갈보리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갈보리’는 ‘해골’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보리는 죄인들을 처형하는 곳이었고, 그 시체들을 던져 놓고 방치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해골들이 널려있고,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죽음의 언덕이고 골짜기였습니다.  

원래부터 그런 곳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곳이었을 텐데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죽음의 장소로 만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의 해골은 어디입니까?
이제는 어느 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전부가 해골로 변한 것 같습니다. 안전한 곳이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온 지구를 덮고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언덕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죄인으로 판결 받아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두 명의 흉악한 범죄자도 그곳에 있습니다. 이 두 명은 해골이란 곳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세운 법과 관행과 기준에 따랐을 때, 죄인 중의 죄인들인 이 흉악범들이 이곳에서 처벌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이 왜 계신 것입니까? 죽음의 권세가 가득한 그곳에 예수님이 계실 이유가 없는데 말입니다. 정죄와 비난과 울부짖는 비명과 고통과 절망으로 인한 고함소리 가득한 그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들고, 서로 비난하고 잡아 죽이고 서로 정죄하는  악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전혀 사랑하지 않습니다. 말로만 합니다. 때와 장소와 사람 가려서 하긴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런 사랑은 세상 사람도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셨는데도 그런 정도의 사랑을 하면서 나는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한심하고 어리석고 완악한 우리들을 예수님은 버리고 떠나지 않고,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런데 찬송과 영광 받으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여전히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으로 계시는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 가신 것입니까?

예수님의 얘기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왔노라” 로마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고…” 저는 설교자로서 성도 여러분들을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정죄하려는 것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고, 바로 내가, 사실은 그 해골이란 곳에 가 있어야 할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초신자도 아니고, 이미 온 아시아와 유럽까지 예수님을 위해 피 흘리며 살아왔던 늙은 바울사도가 하는 고백입니다. 해골의 언덕에 가장 먼저 십자가에 달려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얘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위대한 복음 전도의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기에 죄인중의 죄인, 죄인의 괴수를 가장 먼저 만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또 다른 얘기를 들어 보십시오. 오늘 본문 34절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 말이 나오자마자 그대로 실행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간구하심대로 즉각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지고, 죄 값 중에 단 일 퍼센트도 치룬 적 없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이 의인으로 되어버렸습니다.

해골 언덕에서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땅히 십자가 처형으로 죽음을 당해야 할 죄인들 가득한 죽음의 장소에서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죄를 추궁하지도 묻지도 않고 무조건 용서해 버리는, 그 죄 값까지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엄청난 일이, 피해자이시며, 억울하게 죄 뒤집어쓰고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해골 언덕을 덮고 있던,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죽음의 세력, 죄를 빌미 삼아 사망의 권세를 마음껏 휘두르고 있던 사탄의 세력이 한 순간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전까지는 사탄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잘 진행되어 왔습니다. 지독한 배신과 음모와 더러운 인간의 욕심과 완악하고 강퍅하기 이를 데 없는 종교적인 열심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가장 비참한 죽음에 내 던진 일까지는 사탄의 일이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이제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다 뒤 엎어 버리실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당사자인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말리고, 그러지 마시라고 간구합니다. 용서와 긍휼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해골이 무너졌습니다! 죽음의 장소가 삶의 장소로 변해버렸습니다. 미움과 증오와 원한으로 덮여 있던 곳이 생명의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사탄이 서 있을 자리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한 사람을 통해 확증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한 흉악범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십자가 처형을 받을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주시는 용서와 생명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낙원으로 들어가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서 인류 최초로, 온 우주에서 가장 먼저 그 은혜와 혜택을 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부활은 바로 이 순간, 이 해골에서 시작 된 것입니다. 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해골은 마귀의 본거지이고 활동 주 무대였는데 그 곳에서 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을 열고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용서의 대 선언을 받아들입시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고 말씀드립시다. 그 사람이 나의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합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리하시도록 도와 드립시다. 예수님께서 신나셔서 마귀의 일을 깨뜨리실 수 있도록 예수님을 도와 드립시다. 

사람들은 죽음의 십자가를 해골에 세웠지만,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생명의 십자가로 바꿔 버리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용서하고 용서를 베풀고 산다면 우리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생명의 자가를 세워 나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이 발을 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코로나19의 세력은 주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죽음의 세력입니다. 우리가 비상한 각오로 비상한 기도를 할 때 주께서 부활의 아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길거리와 시장에서 운전하는 도로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곳, 교회 안에서 용서와 긍휼이 선포되고 실행되어 질 때, 생명의 역사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도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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