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를 위한 눈부신 활동

류재하 목사
이상훈 박사의 활동은 학장이 된 후, 교단 내에서 보다 초교파적인 교계의 활동이 더욱 눈부셨다. 평소 그가 지닌 보수적인 신앙과 경건한 삶, 그리고 학자의 깊은 연구를 통해 얻은 해박한 지식 등이 학장이라는 공적 직무를 발판으로 날개를 단 것이다.

그는 교단적으로 서울신대를 대표한 학장이기에, 교단 총회의 신학교육정책위원회의 당연직 멤버였다. 그래서 총회 산하 유일한 신학대학 대표자로서 서울신대를 옹호하고 서울신대의 발전을 위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전국교회가 신학대학을 돕게 하는데 힘썼다.

1979년 당시 총회 산하 교역자양성원을 전국에 3곳(충청, 호남, 영남)에 설립한다는 각 지방회의 건의를 총회가 수락했다. 그래서 3개 지역에서 준비가 완료되면 신학정책위원회가 답사한 후, 총회에 건의하여 허락 받아 OO지방신학교란 명칭으로, 호성신학교가 1980년에, 대전과 부산신학교가 1984년에 각각 개교했다. 이를 위해 신학교육정책위원회가 수시로 소집 되었다.

당시 필자는 총회본부 교육국장으로 이 위원회 실무 책임자로, 모일 때마다 OO신학교 개교에 대한 답사보고를 하는데, 어느 때 이 학장이 서울신대 외 다른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에 반대한다면서, 서울신대를 전폭지원하면 교역자 수급문제는 자연히 해소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총회 안을 지지하는 위원들이 서울신대 졸업생이 지방에 오지 않는 것은 서울신대의 책임이라고 반박하여 치열한 언쟁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상대의 의견을 조목조목 따져본 이 학장이 자기 뜻을 철회하고, 지지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 박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또한 그는 해외 교수직과 한국 교계의 활동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먼저 해외 교수직 활동은, 인도 말랑신학교 교환교수(1977년),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교환교수(1989~1990년), 그리고 초교파적인 한국교계에서의 요직과 활동은 다음과 같다.   

전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 세계신학자대회 대회장(1984년),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이사장((1985~1988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 일백인 선정 중 신학자의 13인에 선정(1985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성서주석위원회 위원장(1989~1992년), 대한성서공회 개혁개정판 감수위원장(1995~1999년), 성령100주년 현존 대표신학자 20인에 선정(2004년) 등 많다.

특히 1995년부터 4년 간 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판 감수위원장 시절, 성서학자들이 번역한 것을 감수위원들이 수십 차례 모여 감수할 때였다. 위원들은 원어의 뜻에 어긋난 번역이나, 원어에 없는 단어를 의역으로 넣은 것이 기존 성경에 많아 그걸 가려내는 작업을 했다.

그 중 하나가 마태복음 1장 1절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것은 한글개역 성경에서 ‘세계’라 번역했다. 헬라어는 ‘게네시스’로 계보, 족보, 기원이라는 뜻인데, 개역성경에서 ‘세계‘라고 의역했으므로, 원 뜻대로 ’계보‘라고 바로 잡았다. 그 외 아주 많다.

이상훈 박사는 65세 정년으로 은퇴한 후, 명예교수로 출강하면서 주일에는 초교파적 ‘새바람 지역사회교회’에 신학자 4분이 교대하며 설교하고, 계속 저술도 하다 2014년 4월 18일 지병으로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연령이 84세였다. 그의 가족은 김영희 사모와 1남 2녀로 모두 고인의 뜻을 이어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잘 하여 교회와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그의 저작은「요한복음 주석」「해석학적 성서이해」「예수의 해석가」「예수 이야기」「신구약 인물이야기」「성서이해의 요점」등, 공저로「신약개론」「바울신학」「현대성서사전>, 역서로「성서해석의 역사」「요한복음 주석」「마가복음 주석」등 15권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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