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 사신 자라고 말할 때 그들이 의미했던 내용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주의할 것은 영혼이 이미 소유한 불멸이 아니라 새 창조이다. 부활의 때는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말씀을 우리가 모든 말씀의 배후에서 읽어내지 못한다면 전 신약성서의 사상은 우리에게 일곱 봉인으로 인봉된 책과 같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오스카 쿨만,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 신약성서 신학자 쿨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어떤 시좌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를 물으며 부활은 새 창조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그에 의하면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호흡을 얻게 되는 생물학적 기적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고 이끌어 가는 힘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와 온 우주를 새롭게 하는 새창조의 시발점이다. “누구도 실제로 보지 못했고, 이후 직접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던 이도 고작 스무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예수의 육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사실과 그 후에 예수가 자신을 방문했다는 사도들의 확신은 가히 세계를 바꿔 놓았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명백하게 불가능한 사건이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라는 점에 대해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믿음을 품었으며, 이는 그들의 도덕, 문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에 극적인 영향을 끼쳤다.”(피터 퍼타도, ‘세계역사 1001Days)

▨… 현대신학은, 이렇게 세계를 바꿔놓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었고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종말이 이미 일어났기’(판넨베르크)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선언은 비록 우주를 삼키는 어둠이 덮쳤다하더라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간직하는 믿음에 설 수 있다는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 믿음이야말로 ‘종말론적 믿음’ 아닐까.

▨… 올해의 부활절을 맞는 감회와 결의는 여느 해와는 달라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른 편법일 뿐이다. 교회는 누가 무어라 하든 ‘함께 예배드리는 예배 공동체’다.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카타콤에 숨어들었고, 대서양을 건넜으며, 공산당 치하에서 생명을 던졌다. 이 믿음의 전통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묻기가 두렵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