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집에 머무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공공기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감염의 시대에 요구되는 삶은 잠재적 전염체인 타인으로부터 나를 최대한으로 떨어뜨리고 숨기는 일이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외로움 또는 고립이 꼭 필요한 때라는 것이다.

환대(Hospitality)는 내가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물론, 환대가 타인과 관계를 맺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예를 들면, 혐오를 동반한 배제 또는 타인을 배제하지는 않으나 긍정적으로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관용도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환대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느끼는 두려움에 대항하는 행동이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의 방문 또는 사회의 불안을 야기하거나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가진 외부인의 방문에 대하여 너그러움이라는 시민의 덕목을 환대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대응하였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에서 환대의 너그러움을 받는 사람의 염치가 요구되었다. 즉, 그리스-로마인들에게 환대의 너그러움을 받은 사람은 빚진 자로서 고마움 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야 했다. 너그러움에 대한 값을 지불해야만 환대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온 기독교 환대는 빚 없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지향해왔다. 기독교 환대의 근본은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환대에서 비롯된다. 기독교 환대 전통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환대가 그 은혜를 받은 수혜자를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즉 기독교 환대는 너그러움의 빚을 갚을 수 없는 수혜자를 값없이 내어주는 너그러운 행위의 주체로 탈바꿈 시키는데 의미를 둔다.

간추린 환대 연구의 역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전염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 대해서이다. 매주 예배를 통해 고백하듯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환대의 은혜를 맛본 수혜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환대의 행위자가 되었는가? 물론 보이지 않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중심적이다. 왜 정부의 지침이 교회의 공 예배를 제한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냐는 푸념 속에서 자랑스러운 기독교 환대의 전통, 덕목, 실천을 찾아볼 수 없다. 나의 안전, 내가 속한 교회, 내가 헌신한 종교의 지위 유지에만 급급한 듯하다.

오랜 기독교의 역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환대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중심이다. 왜 나만 못살게 구느냐는 불평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감염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적 거리 두기는 ‘물리적 거리 두기’를 시행함과 동시에 ‘사회적 연결하기’를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집에 머무는 일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다. 타인을 위해서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행위도 환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환대가 단순히 물리적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환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내가 변화되어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다가갈 수 있는 방책이다.

쉽게 말하면, 환대는 문자적으로 타인에게 다가가기인데 이는 나 자신에게 다가가기, 또는 나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나를 고쳐 하나님이 보여 주신대로 이웃을 공감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이로 변해야 한다. 타인을 위해 내가 변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환대이기 때문이다.

고립되어 있다고 환대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의 위험성 때문에 물리적으로 다가갈 수 없다. 여전히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욕하기보단 너그럽게 이해해주자. 그들의 실수와 잘못을 기꺼이 받아주자. 또한 정중하게 권면하고 때론 강력하게 요구도 하자. 이것이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환대, ‘사회적 연결하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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