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후, 교수생활과 학장 역임

류재하 목사
그는 미국 에스베리 신학대학에 유학을 가서, 전공을 신약신학으로 택했다. 그는 신약 중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독창적인 요한복음서에 큰 은혜를 받았기에 더욱 깊이 연구하고 싶은 이유였다. 그래서 별로 공부한 적이 없는 헬라어를 배우는데 그의 어학적 재능이 발휘되었으며, 모든 과목도 거의 A학점을 받아 2년 만에 M.Div 학위를 받고 귀국한 것이 1964년이었다.

그는 귀국과 동시에 서울신학대학 전임강사로 승진함과 함께 거의 30년 간 이 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그의 첫 강의 때부터 학생들은 그에게 매료되었다. 당시 신입생이던 최종진 목사는 그에 대한 첫인상을 “우리들의 선생님!”이란 글에서 그의 몇 가지 특징을 짚었다.

그것은 젠틀한 외모, 영어에 능통한 지성적 언어유희, 다른 교수와 달리 손바닥만한 카드 몇장에 요약된 강의내용을 넘기면서 유창하게 강의하는 모습 등이다. 특히 그의 지성적인 언어는 음유시인이 지닌 지성과 감성이 합성되어 학생들은 ‘황금의 입’이라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유학 시절에 미국에서 신학의 권위자로 알려진 닥터 쿤 교수가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수업할 때는 반드시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것을 보고 감동 받았다. 그래서 그는 서울신대에서 강의 시작과 마칠 때 반드시 기도한 것은 학생들 경건생활의 훈련이었다.

1970년대 초에는 국가에 유신헌법이 선포되어 자유가 일부 제한 받자,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 중 대학생들이 있었다. 서울신대도 몇 가지 문제로 시위가 일어나자 당시 학생처장이던 그는 학생들의 뜻을 공감하면서, 신학생으로 시위 방법에 문제 있다고 달래는 등 고생을 했다.

그의 학교 사랑과 학구적 열의에 감동한 당시 조종남 학장의 주선으로 1977년 그는 미국 웨스턴복음주의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수여 받아 학자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 후, 그는 뜻밖에 학장대행(1980)을 거쳐 1982년에 서울신대 제7대 학장과 1984년에 제8대 학장이라는 중임을 맡게 된다.

1980년 당시 국가는 신군부에 의해 또 군사정권이 계속되자, 각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부르짖는 데모가 계속 일어났다. 서울신대도 교내 시위가 일어나, 학장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다. 당시 조 학장은 학교를 부천으로 옮기는 등 학교 발전에 큰 공로가 있었지만, 그의 12년 오랜 학장생활이 문제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조 학장은 1년 간 안식년으로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한 후, 귀국하여 사표를 냄으로 잔여임기와 함께 이상훈 박사가 학장으로 6년 간 시무했다.

그의 학장으로서의 공헌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학교의 엠블렘(마크)을 새롭게 제작했다. 성경을 중심으로, 검(진리) 나팔(선교) 횃불(성령)을 상징하고, 1911년 창립연도를 넣어 오랜 전통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그의 아이디어로 디자인 한 것이다.

둘은, 젊고 유능한 교수들을 영입하여 학생들의 지성을 높였다. 목창균, 권혁승, 이상직, 장중열, 한영태 교수 등 그의 재임 시 발탁된 외국 유학파들과 미국 대학교수 출신인 한의신, 김갑동 등이다.  셋은, 도서관의 건립이다. 대학으로 단독 건물 도서관은 당시 최초였는데, 당시 ‘이명직 기념사업회’(회장 김용은)의 건의를 받아 <이명직 기념도서관>으로 명칭을 붙였다.

그러나 당시 이00, 한00 교수가 이혼자라는 정보를 받고, 그들을 퇴직 시킨 것은 무리였다. 그들은 상대에게 각각 이혼을 억울하게 당한 것인데도 밀어부친 것은 그의 지나친 보수신앙 때문이었다. 그들이 소송을 하면 승소할 수 있지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호서대학교에서 그들을 영입함으로 일단락 된 것은 하나님 은혜지만, 그의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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