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을 잃었다 해도 슬픔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소유한다 해도 시기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며, 두려움도, 미움도 없을 것이다. 요컨대 영혼의 동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없어질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다. 그러나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기쁨으로 영혼을 먹이며, 어떤 슬픔도 여기에 끼어들지 않는다.”(바뤼흐 스피노자, ‘지성개선론’)

▨… 44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 유대교회의 파문 탓으로 동족의 냉대 속에 철학자의 길을 가야했다. 그 길은 그가 남긴 유산 목록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가난을 감내해야 하는 삶이었다.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현미경과 망원경에 쓰이는 렌즈를 깎는 기술을 습득해야 했었고 종내는 렌즈 가공으로 마신 유리 가루로 폐질환을 앓아 생명을 잃었다.

▨… 스피노자는 가난을 벗어나고 명예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의 의지로 외면해버렸다. 하이델베르크대학 철학 교수직에 청빙받았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교수직과 철학자의 길을 양립시킬 자신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저서를 자신에게 헌정하면 연금을 주고 지속적인 후대를 약속하겠다는 프랑스 루이14세의 제의도 거절했다. 그는 정복당한 네덜란드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스피노자에게 철학에의 길이 천직이라면 목사들에게 목회는 소명(vocation)이다. 이 소명 때문에 예배당의 크기가 작아서 2미터의 ‘사회적 거리’를 두지 못하고 ‘다닥다닥’ 붙어앉을 수 밖에 없지만, 또 가난한 교회여서 온라인 시설을 할 수 없어 가슴이 미어지지만, 그 작은 교회 목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가슴에 있어 무릎을 꿇는다. 높은 사람들은 다문다문 앉아 “마스크 벗고 회의합시다”라고도 하지만 체온 재고, 세정제 갖추고, 마스크 써도 예배실 문 못여는 이 좌절감을 도대체 뉘 있어 알아줄까.

▨… “내일 종말이 온다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말을 스피노자는 한 적이 없다고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말했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이 땅의 작은 교회 목사들은 내일이 종말이라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는 심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며 텅 빈 예배당에 무릎을 꿇는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부러워하지 말자, 다짐하면서. 코로나 창궐의 책임을 교회에 지우려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게 하소서,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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