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철 박사
방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인데, 그때 예루살렘에 모였던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들었다. 그들의 증언이다,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 2:7~8) 여기에서 나오는 방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은사이다.

반면에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행 19:6~7) 이런 방언도 역시 공부나 노력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방언은 성령이 임의로 주시는 은사다. 방언을 받는 사람들의 자격이나 업적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은 스스로 원하거나 아니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추천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방언을 포함한 성령의 은사 9가지를 열거하면서 그 은사들을 성령이 주신다고 분명히 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그렇다! ‘그의 뜻대로’ 주어진다.

그런데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분명한 가르침에 반하여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한다.

중요한 것이 또 있는데,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을 들어보자,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29~30)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은사만을 주시지 않는다는 분명한 말씀이다. 그들이 각기 다른 은사를 사용할 때 교회가 균형 잡힌 성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언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를 주시는가? 그들이 거듭날 때인가? 아니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인가? 아니면 기도를 많이 할 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은사를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 그 해답은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 성령이 들어오시는가? 물론 거듭나는 순간이다. 그들이 거듭날 때 성령이 그들 안에 들어오시며, 그때 은사가 주어진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은사를 받았는지, 또 받았다면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 모르는가? 이유는 그들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인지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은사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찾으면 보다 효과적으로 교회에서 섬길 수 있다.

그렇다면 은사는 모두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셨기에 똑같이 중요한가? 물론이다! 모든 은사는 성령이 주시기에 그 중요성에 있어서는 똑같다. 그러나 똑같지 않은 것도 있는데, 그것은 은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은사는 그만큼 더 큰 은사이다. 가장 큰 은사는 사도이며, 그 다음은 선지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도와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다.(엡 2:20)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거의 끼치지 못하는 은사는 바로 방언이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만 유익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바울 사도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이왕 은사를 위하여 기도하려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명령이다. 이런 분명한 명령이 있는데도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해서 안달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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