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건국의 역사를 보며 헌신 결심

류재하 목사
한반도에 해방과 더불어 광복이 왔다. 1945년 8.15 정오에 일본 왕이 라디오를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지난 36년 간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차별과 착취를 당한 대한인은 갑자기 닥친 광복에 놀라면서도 기쁨과 감격에 벅차 전국적으로 해방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그 감격도 잠시, 연합국의 얄타협정에 따라 한반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당시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정치를 했다. 북한은 소련의 주도로 강제로 공산국가를 세우느라 혈안이 되었고, 남한에 주둔한 미군들은 민주적 국정을 이행하는 동안 한국인 정치세력들의 주도권 다툼으로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몇 년 간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이 입국하여 미군의 지원하에 미국식 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힘썼다. 마침내 유엔총회의 허락으로 남북공동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세우려 했으나 소련이 반대하므로 할 수 없이 남한만이 제헌국회의원을 선거하여 민주주의 헌법이 제정되고, 그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선출되어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새 정부의 교육정책에 따라 이상훈의 원주 농업학교는 5년제 중학교에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과정으로 분리되었다. 그는 중학 2학년 때 해방을 맞았고, 1949년 새로 건국된 대한민국에서 원주농고를 졸업할 수 있게 된 것에 하나님께 감사했다.

광복과 건국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우리 힘으로 해방할 수 없는데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연합국을 통해 우리에게 광복을 선물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다. 또 해방 후, 사회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인류역사를 주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자, 그의 신앙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고교시절, 미군 행정관들이 원주에 들어와 대민관계 업무를 위해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찾아 원주농고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래서 이상훈을 비롯한 고교생 10여 명이 지명되어 매주 토요일마다 관청에 가서 통역으로 대민관계 업무를 도왔다. 그들은 미군들과의 직접 영어회화는 처음이기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계속 들으니 귀가 열려 통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평소 영어공부에 노력한 결과 학생으로서 사회봉사를 할 수 있어 감사했다. 그들의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미군들은 학생이기에 초콜릿과 껌, 빵, 과자나 통조림 등을 사례했다. 그가 받은 선물들은 가난한 그의 식구들에게 아주 소중한 별식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1949년 3월에 고교를 졸업한 후, 대학진학을 앞두고 큰 갈등에 빠졌다. 학교에서는 성적이 우수하니, 서울대학이나 연희대(현 연세대)나 고려대라는 소위 일류대학에 지원하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교회 목사님은 실력 있는 목회자가 되어 영혼들을 구원하라고 권면했다.

그는 소위 일류대학의 영문과에 지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합격한다고 해도 비싼 등록금이 문제였다. 이 문제로 가족 간 갈등이 생겼다. 먹고 살기에도 힘 드는데 대학은 어림없다고 부친이 계속 반대했다. 그는 효자지만 이 문제로 처음으로 부친과 말다툼을 해서 그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대학진학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일년 동안 그의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 교회에서 이성봉 목사님을 모신 부흥회에서 그는 큰 은혜를 받는다. 그래서 강사님께 진로문제를 상의했더니, 서울신학교에 진학하면 미국 성도들이 주는 장학금으로 돈 없이 공부할 수 있고, 영어 잘하면 미국 유학도 갈 수 있다는 말에 그는 놀라며, 기도와 성경공부에 힘쓰다 이듬해에 서울신학교에 입학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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