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철 교수
코로나19(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하여 세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질병관리본부는 초기에 제시된 기준에 얽매이지 말고 의사의 판단에 따르라고 말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은 이미 2002년 중국 광둥성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확산된 사스(SARS)를 추월했다. 

세계를 위협하는 코로나19 때문에 얻은 두서없는 두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첫째는 ‘의심하는 자를 믿음이 부족하거나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엉뚱한 생각이다. 방송에서 신종 코로나 관련 인터뷰를 하는 의료전문가의 입에서는 100%라는 말을 들을 수 없다. 확신을 시키거나 안심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료진들은 여러 상황을 의심하면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에 대처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해외여행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의심의 눈길을 주게 만들었다. 그것이 세상을 안전하게 만든다는 인상을 준다. 이상하지 않은가? 신뢰가 아니라 의심이 세상을 안전하게 하다니!

우리는 의심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로 여기지 않는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1:6)고 해서 세상에 벌어지는 일을 의심하는 사람을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걱정하고 조심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약한 사람들로 생각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믿음은 주님의 것이다(히12:2).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다.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지, 내가 먼저 믿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믿음에 관해서는 누구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다. 믿음에 관해서 자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다. 우리는 오히려 나의 믿음을 항상 의심하고 세상을 경계하여야 하지 않을까?

코로나19 때문에 떠오른 두 번째 생각은 격리가 아니라 성찰의 기회로 받아들이면 어떤가하는 생각이다. 어떤 교회는 온라인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도 서로 멀리 떨어져 앉거나 마스크를 쓴다. 코로나19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경계를 지켜주기 시작했다.

전에는 상대방이 인상을 찌푸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갔다. 팔을 툭툭 치며 말을 건넸다. 상대방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신체적 접촉을 했다. 이제 코로나19 때문에 서로에게 경계를 둔다. 그러나 경계만 세우면 안 된다. 혼자 있는 시간에 성찰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아카데미 4관왕 봉준호 감독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창조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이 그를 향해 기립박수하게 만들었다. 혼자 하는 성찰의 시간이 창조적인 일을 만든다. 물론 개인적인 것이 창조적인 것이 될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것이 세상과 연관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성찰의 시간은 세상을 위한 의미 있는 시간이 된다. 

에모리대학교에 수학중일 때다. 어둠이 이미 깊어진 저녁에 ‘터너 빌리지’라는 기숙사에서 혼자 있었다. 나의 숨소리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학교 캠퍼스 안에 기찻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는 기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분주하고 시끄러운 낮에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적막한 밤에 혼자 있을 때 들을 수 있었다. 코로나19 때문에 격리가 아니라 성찰의 기회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성찰을 하면 듣지 못했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람들로부터 분주해서 듣지 못하던 작은 목소리, 약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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