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소망이 있다

하도균 교수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고 회복하기 위해 복음전도를 활성화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도를 위한 방법과 수단이 강조되기도 하고, 그 방법과 수단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효율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방법이 필요하고 수단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을 잃어버린 방법과 수단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없습니다. 요즈음 행해지는 전도가 본질을 잃어버렸다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그 본질적인 의미가 퇴색해 버려가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전도를 그저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만 취급하려 들기 때문이지요. 전도의 본질은 내가 듣고 경험한 복음의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개개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레, 초대교회 교인들을 향해 던진 베드로의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 3:15). 이 말씀은 참 역설적인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난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있는 것, 그리고 숨 쉬는 것 자체가 힘들고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핍박받고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하기 위하여 베드로 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라는 어구를 사용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핍박 속에서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과감히 “너희 안에는 소망이 있다”고 단정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소망은 살아있는 “산 소망”(벧전 1:3)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세상만 바라보며 세상에 모든 것을 맞추어가며 살아간다면 로마의 박해 때문에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지만, 너희에게는 소망이 있지 않느냐? 그것도 꿈꿀 수는 있지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소망이 아니라, 매일 살아 움직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리고 목적하신 곳으로 너희의 삶을 끌어가는 산 소망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사실 베드로 사도는 로마의 핍박을 피하여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산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때문에 갖게 된 그들의 십자가! 즉, 고난과 핍박이라는 십자가가 있었지만, 십자가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 때문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산 소망, 매일 살아 움직이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 되면 분명히 얼굴에 죽을상을 짓고, 예수를 포기하거나 어려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소망이 있었고 그 결과 그들의 삶에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이유를! 그리고 소망이 있는 이유!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경험한 자신들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말해주었고, 평안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때 세상은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본질에 접할 수 있었고,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해진 복음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놀라운 결과들이 산출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론만이 아닌, 자신들이 먼저 경험한 것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과 다른 것을 전해주어 그들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늘 우리 교회들을 봅니다. 전도를 강조하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본질의 목적보다도, 기업처럼 성장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전도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전도를 위하여 먼저 회복되고 되찾아야 할 부분이 무엇일까요! 날마다 살아있는 소망! 나를 목적지를 향하여 끌어 줄 수 있는 소망만 있으면 힘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소망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하였던 십자가로 얻은 소망과 평안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힘들고 어려운 죽음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것들을 못 박는 대신, 이 땅에서 누릴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것들을 선물로 가져다줍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하나님나라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중요한 기독교의 심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십자가를 통해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평안, 그리고 산 소망!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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