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교단 문학과 신학적 공헌

송기식 목사의 큰 장점 중 또 하나는 글 쓰는 것이다. 그는 평소 말하기보다 글쓰기를 더 좋아해서 아무리 바빠도 부탁하는 원고는 거절한 적이 없다. 그 한 예로, 그가 활천에 발표한 글을 보면, 무려 100편이나 된다. 시, 수필, 칼럼, 논설, 사료발굴, 성서강해 등 많지만 그 중 성서강해가 56편이나 되어 그의 관심과 집필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전도사 시절부터 끊임없이 연구하여 활천에 글을 발표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1998년에 월간 「문예사조」의 수필로 등단하므로 사회가 공인하는 문인으로 인정받았으나 일반 문학적인 글보다는 신앙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를 즐겼다. 기독교 관계 서적에 자주 칼럼 등을 발표했으며, 또 방송설교나 기독교 잡지, 신문 등에도 많은 칼럼을 발표했다.

그래서 낸 책들이 요약설교집 「낮에도 밤과 같이」, 강해설교집 「안개인생 나그네 인생」(벧전후서 강해집), 「하나님은 참되시다 1, 2권」(로마서 강해집), 「절기 및 기념일 설교집」(공저), 신앙칼럼집 「세상, 교회, 예수」, 인물전 「성결교회 인물전」 1~10권 (공저), 논문집 「묵자와 R. 니버의 사회사상 비교」, 인물평전「순교자 박봉진 목사」 등으로 성결교단의 강해설교와 문서선교의 발전에도 공헌을 했다.

특히 송기식 목사는 같은 세대 동료 목회자 중 탁월한 학구열과 지성으로 무장한 목회자다. 1960~1970년대의 한국교회는 역사상 대성장의 기간에 해당하며 이 성장에는 성령을 의지하는 부흥회 전성시대였다. 성결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해마다 봄과 가을의 2번 부흥회를 교회마다 개최하여 은혜 받은 성도들에 의해 교회 성장이 촉진되어 부흥사들이 큰 인기였다.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은혜와 진리를 겸전해야 하는데, 인기 있는 부흥사들이 너무 은혜와 은사만을 강조해서 교단이 자칫 은혜주의, 감성주의에 빠져가는 위험이 있었다. 이것을 신학과 목회적으로 지적한 분은 거의 없고 당시 유행에 따른 기도원들은 항시 만원이었다.

이때 송기식 목사가 기관지 활천을 통해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너무 은혜, 은사주의로만 치우치고 있어 위험하다. 은혜와 진리를 함께 강조함으로, 반지성적인 교단의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논설을 실어 바른 목회를 강조했다.

그런데 어느 부흥사가 이 글을 읽고 송 목사를 ‘은혜를 반대한 자유주의자’라고 곡해하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송 목사를 비난하는 말을 했다. 그렇지만 송목사는 혼자 외롭게 교단의 잘못된 상황에 10여 편의 논리정연한 논설과 설교를 통해 성결교회가 은혜와 진리를 겸전한 복음주의 교단으로 성장할 것을 계속 주장하고 역설했다. 이에 동조하는 분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 교단이 오늘의 건전한 복음주의 성결교단으로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자리매김을 하는데 일조했다. 지금 우리 교단은 한국 기독교계가 복음주의의 대표적 교단으로 인정하고 있을 정도다. 이는 송목사가 목회와 신학적으로 우리 교단에 기여한 사실로, 교단의 역사에 기록할만한 중요한 사건이다.

송 목사는 2010년 은퇴하여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은 후, 2015년 10월 8일 지병으로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천국환송예배는 10월 12일 수원교회장(葬)으로 거행한 후, 화성시립추모공원에 안장하므로 76세의 생애를 마치고 안식하며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

가족으로는 2년 먼저 소천한 고 최경자 사모와 1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송수용 목사와 둘째 사위 류세종 목사가 송 목사의 뜻을 받들어 목회자로 헌신하고 있으며, 첫 사위 김영기 박사는 미국 델라데어대학교 교수로 세계화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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