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성훈 목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와 신 광야를 거쳐 르비딤에 장막을 쳤는데 물이 없자 하나님은 반석을 쳐서 그들에게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이 때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습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을 우리 국어 성경은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출 17:8)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참 잘 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서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는 히브리어의 ‘베 야보’를 번역한 말입니다. 히브리어의 ‘베’ 라고 하는 접속사와 ‘야보’라고 하는 동사 ‘왔다’ 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직역하자면 “그리고 그가 (아말렉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국어 성경에서는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라고 번역을 한 것일까요? 이는 출애굽에서 르비딤에서의 식수 문제를 해결한 사건을 기술하다가 갑자기 화제를 전환시켜 아말렉의 침입 사건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사건들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한꺼번에 생겨나지 않고 식수 문제를 해결한 후 나름대로는 여유를 가진 다음에 아말렉의 침입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배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 없이 평안하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함을 받았다면 더 좋지 않았겠느냐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아무런 시험이 없고 고난 없이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미국 워싱턴에서 최초 상원의원이 되고 나중에 상원 부의장을 지낸 신호범씨라는 분이 있습니다. 2006년에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분이 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난리통에서 떠돌아 다니며 거지생활을 하다가 미군부대에서 잡일을 하는 하우스보이로 들어갔습니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美) 군의관 치과의사가 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서 일을 했는데 나중에는 박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됩니다. 그런데 그의 양 부모님이 그렇게 자기에게 잘 해주었는데도 친아들은 잘못했을 때 채찍을 드시고, 자신은 잘못을 했는데도 때리기는커녕, 야단을 치지 않는 사실이 그토록 섭섭하더랍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마다 징계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는데도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100% 약이 될지언정 독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보기에는 아말렉 대적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축복입니다. 이는 우리를 연약한 자로 키우지 아니하시고 강한 자로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말렉의 기습 사건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대한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련과 환란은 언제나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련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시련과 환란은 우리 인간 뿐 아니라 하나님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친히 인간이 되시고 이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분의 사랑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사랑으로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굳게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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