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가 너무 하고 싶어 교수직 버린 목회자

류재하 목사
송기식 목사는 하나님께 받은 다양한 은사로 많은 기관장과 사회봉사의 리더 역할을 잘 감당했다. 그는 전국교회학교 연합회장을 시작으로 강남지방회장, 총회 교육부장, 중부지역총회장, 서울신학대학 강사 및 겸임교수(동양사상) 서울신학대학교 총동문회장, 교단의 바른목회협의회장, 한국성결신문 논설위원, 활천 편집위원, 총회 목사고시위원장 등 많다.

또 대외적으로는 강남경찰서 교경협의회 회장을 비롯하여 성결교회 역사와 문학연구회 회장, 수원 기독호스피스회 이사장, 수원시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목회자협의회 상임회장. 수원 생명의전화 이사장 등 봉사활동도 화려했다. 그러나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교육 관계였다.

그의 교육관계 활동을 꼽아보면, 전국교회학교 연합회장(1975), 전남 광주 숭의종합고 교목실장. 계명대학교 강사(기독교개론), 영남신학대학 강사(신약개론), 서울신학대학 강사 및 겸임교수(동양사상), 서울신학대학교 부교수(1991) 등이 있다. 교육은 언어로 가르치고, 동시에 문자로 써서 가르치는 기능인데, 그는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결코 웅변조가 아닌 조용한 어조로 시작하는 그의 설교는 확고한 신앙을 바탕으로 해박한 지식과 철학성이 있는 예화가 곁들여지면서 복음의 핵심으로 접근해 강한 어조로 결론이 이어져 누구나 은혜 받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매력이 있어 말씀중심의 부흥회를 많이 인도했다.

하지만 학위를 받기 위해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인 탓인지, 그의 건강과 함께 목회가 지칠 때가 있었다. 50대가 넘어서자, 그는 건강관리도 할 겸 1991년에 목회보다 교수를 택한 적이 있었다. 그는 목회 중에도 가르치고 싶어 교회를 전격 사직하고, 10년 간의 서울신대 강사 및 겸임교수 경력을 바탕으로 서울신대 부교수로 전임해 동양사상과 종교철학을 강의했다.

교수직은 목회처럼 다양한 활동을 요구하지 않아 당분간 건강을 관리하면서 맡은 일에만 전념했다, 그 결과 건강이 많이 호전되었다. 교수직을 따라 집도 부천으로 옮겼으므로 처음에는 집 근처의 성결교회나 다른 교파의 교회들을 주일마다 순회했다. 출석 교회를 선택하기 위해서였지만 결국 한 교회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우선 목사들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는 그의 교만보다는 학문과 목회경험에 따른 설교론에 입각한 개성적인 확신 때문이다.

1년이 지나자 그는 갑자기 설교가 하고 싶어졌다. 그는 지난 25년 동안 주일마다 설교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래서 교수를 하면서도 설교를 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몇 달 후, 그에게 주일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이 들어왔다. 그것은 수원의 어느 개척교회였다.

아주대학교가 세운 큰 장로교회가 무슨 문제로 십여 명의 집사들 가족이 교회를 탈퇴하여 어느 집사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설교자 때문에 어느 주동 집사가 평소 친한 어느 성결교회 목사에게 부탁한 결과 신학교수로 있는 송 목사에게 주일설교를 부탁한 것이다.

이렇게 그 교회에 한 번 설교한 것이 신자들의 계속되는 요청으로 매주일 설교하자, 두 달 만에 신자들이 50여 명으로 늘어나 어느 번화가 2층 가게를 얻어 교회를 확장했다. 그는 주일설교와 수요일예배만 인도하기로 하고, 여 전도사를 두고 심방하게 했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났다.

1993년 초 수원성결교회에서 그에게 담임목사로 청빙이 왔다. 담임목사가 미국이민을 갔기 때문에 교회에서 후임자를 물색하다 송 교수가 수원 모 개척교회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것이다. 교수냐? 목회냐? 두 가지를 겸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기도하던 중 그는 목회를 선택했다. 그의 말은 “송충이는 솔잎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수원교회 목회는 21년 간 계속되어 마침내 원로목사로 은퇴할 때까지 교회가 크게 성장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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