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선비들이 만들어간 역사의 땅

▲ 북촌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북촌전경.
조선이 중쇄기에 접어들자 율곡 선생은 경장(更張)을 부르짖는다. 남쪽 오랑캐 왜에 짓밟히고 북쪽 오랑캐 청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를 당한다. 조선중화를 외치면서 조선을 다시 걷는다. 진경시대(眞景時代)를 연다. 오랑캐에게 당한 복수를 갚아 수치를 씻고자(復讐雪恥) 북벌(北伐)을 준비한다. 그러나 효종은 급작스럽게 승하하고 조선중화는 자만심으로 변질된다. 담헌 홍대용·연암 박지원·초정 박제가 등 북학파 북촌 선비들이 머리를 맞댄다. 오랑캐나라 청으로 가서 배운다.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위기가 고조된다(西勢東漸). 김옥균·홍영식·어윤중·박영효·박영교·서재필·서광범 등 개화파 북촌 양반자제들이 죽동 민영익 사랑에 모인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의 재동 사랑에서 북학을 배운다. 북학으로 무장한 개화파는 조선을 근대화할 방책을 찾는다. 북촌 선비들이 조선을 만들어간 북촌 개화길을 걷는다.

▲ 재동 백송
재동 백송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를 빠져나와 도로를 건너면 대리석 건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헌법재판소다. 조선말부터 구한말까지 재동은 숨 가쁜 역사의 현장이었다. 헌법재판소 안으로 들어가면 국내 다섯 그루 밖에 없는 멋진 백송 두 그루가 찾는 이를 압도한다. 개화파를 길러낸 박규수의 집터다.
1866년 평안도관찰사로 평양에 부임하자마자 제너럴셔먼호가 침략한다. 연환계로 제너럴셔먼호를 물리치고 한성판윤이 되어 재동 백송집으로 돌아온 것은 1869년. 북촌 양반 자제들이 박규수를 찾아온다. 평안도를 침범한 미국 상선이 궁금했던 것이다.
박규수는 지구본을 꺼낸다. 중국을 가리키면서 묻는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어디인가? 북촌 양반자제들은 답한다. 중국입니다. 지구본을 빙그르르 돌려서 미국을 가리킨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어디인가? 미국입니다. 거침이 없다. 다시 지구본을 돌려서 조선을 지목한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어디인가? 묵묵부답! 말이 없다. 조선사람들은 중국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개화파로 성장한다.

백인제 가옥
재동 백송을 뒤로 하고 가던 방향으로 더 올라가면 사거리를 지나서 왼쪽 골목 안쪽에 가회동 백인제 가옥이 있다.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했으나 3.1운동에 참여하면서 제 때에 졸업하지 못했다. 그가 길러낸 제자가 장기려 장로다. 스승처럼 수석으로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지는 못했지만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는 일인들에게 수치를 안겨주었다. 스승은 인제대학교와 부속병원 백병원을 설립한다. 백인제는 병원과 대학이 된다. 제자는 고려신학대학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부속병원 복음병원을 세운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담배 한 갑 돈을 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한다. 담배 끊고 건강하게 살라는 뜻이다. 이것을 근간으로 대한민국 의료보험이 출범했다.

▲ 중앙고 삼일당
중앙고등학교 삼일당
가회동 백인제 가옥에서 길을 건너 북촌로 8길을 가로지르다 끄트머리에 있는 계동감리교회를 끼고 왼쪽 계동길을 따라 올라가면 막다른 곳이 중앙고등학교 정문이다.
숙직실 삼일당에서 3.1독립만세운동 그 도화선의 불을 당겼다. 1919년 1월 동경유학생 송계백이 숙직을 하던 현상윤 교사와 송진우 교장을 만난 자리에서 동경유학생 ‘2·8독립선언서’를 건넨다. 이어서 보성고등학교 최린 교장 재동집을 방문한다. 이를 계기로 현상윤·송진우·최남선·최린 등이 회동한다. 최남선의 편지를 받고 남강 이승훈 선생이 합류하면서 조선기독교 전체가 3.1운동의 주역이 된다.
2월 24일 남강 이승훈 선생이 북촌 송현동 천도교중앙총부로 의암 손병희 선생을 찾아간다. 계동 유심당에서 최린 교장과 만해 한용운 선생이 회합을 갖고 불교계도 동참한다. 2월 28일 인사동 승동교회에서 대학생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독립선언서 배포를 분담한다. 북촌에서 독립만세를 외친다. 온 조선교회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한다. 조선 천지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만세 소리 울려 퍼진다.
1945년 8월 15일 나라를 되찾는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이 대한민국”이라고 밝힌다.

▲ 고희동 가옥
원서동 고희동 가옥
1882년 조선은 미국과 국교를 수립한다. 운미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보빙사를 파견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감사의 뜻을 전한다. 보빙사를 수행하여 미국에서 통역을 한 역관은 고영철이다. 고희동의 아버지다. 고영철은 아들을 한성법어학교(한양불어학교)에 입학시켜서 프랑스어 공부를 시킨다.
한성법어학교에서 서양 그림을 접한 고희동은 동경미술학교로 5년 동안 유학을 간다. 고희동은 졸업작품으로 유화 「부채를 든 자화상」을 그린다. 우리나라 최초 서양화가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조선으로 되돌아왔을 때 유화를 그릴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물감조차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어 한국화를 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곡 고희동의 한국화에는 원근과 명암 그리고 채색등 서양화 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주로 금강산을 그렸다. 조선의 아름다움과 문화민족의 우수성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의 손끝에서 한국화로 다시 살아났다.

북촌한옥마을
남산 목멱산을 마주보면서 언덕 위에 한옥이 즐비한 북촌한옥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한양 인구가 급증한다. 특히 일본인들의 증가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남촌이 비좁았다. 일본인 개발업자들은 청계천 이북 북촌에 땅을 사고 문화주택을 지어 점점 북촌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이에 맞서 조선인 개발업자 정세권이 북촌 땅을 사들인다. 가회동과 익선동에 근대식 조선집을 지어서 분양한다. 문화주택을 누르고 조선집이 이긴다.

▲ 조선어학회 터
정세권은 북촌한옥마을과 익선동한옥마을 조성하고 분양해서 번 돈으로 조선어학회를 지원한다. 전국에 조선말을 모아서 우리말 큰 사전을 펴내는 작업에 돌입한다. 일제는 정세권과 조선어학자들을 잡아들여서 모진 고문을 자행한다. 두 분의 학자가 유명을 달리하자 정세권은 일제와 타협한다. 고문을 중단하고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석방하면 우리말 큰 사전 편찬 작업을 중단하고 모든 자료를 소각하겠다. 그리고 뚝섬을 일제에 헌납하겠다. 일제는 정세권의 타협안을 수용했다.

▲ 안동교회
안동교회
북촌 재동 안동교회는 양반교회다. 도로 건너 북촌 인사동 승동교회는 백정교회다. 1892년 무어 선교사는 곤당골교회와 기독교소학교를 세운다. 소학교 학생 박서양이 발진티푸스에 걸린 아버지 박성춘을 데리고 온다. 고종의 어의 에비슨 선교사가 백정 박성춘을 치료한다. 박성춘은 감사의 표시로 한양 장안에 모든 백정들을 이끌고 입교한다.
1895년 4월 20일 곤당골교회에서 선교사들이 백정 박성춘에게 세례를 베풀자 많은 숫자의 양반들이 교회를 나가서 홍문섯골교회를 세운다. 1898년 곤당골교회는 화재로 소실되자 선교사들은 홍문섯골교회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구리개 제중원에서 같이 예배를 드린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을 준공하면서 인사동 승동교회로 분립한다. 양반들은 1910년 재동에 안동교회를 세워서 나간다. 이리하여 한양에 양반교회가 선다. 1911년 백정 박성춘이 승동교회 장로가 되면서 백정과 양반 사이에 해묵은 갈등을 해소한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