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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시론> 운명 혹은 운명적인 것에 대하여
[1212호] 2019년 12월 31일 (화) 20:10:32 김종두 목사(수성교회) kehcnews@daum.net

   
        김종두 목사
살다 보면 인생의 단층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프레임을 적용해도 해석되지 않는 인생의 심연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시편 기자들이 “어찌하여?”라고 절규했던 이유입니다. 그것을 ‘운명 혹은 운명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서구적 관점에서 인간의 운명론은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시지프스의 신화’로 표상됩니다. 오이디프스의 운명은 비극이고 시지프스의 신화는 부조리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비극을 비극으로 부조리를 부조리로 의식하지 않는 한 운명은 그저 익명의 그 무엇일 뿐입니다. 설령 누군가 자신의 운명을 의식한다 할지라도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운명과 내가 별개의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이 나를 지배하려 하고 나는 그 운명과 맞서 투쟁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때로는 신에게 귀의하기도 합니다.

카뮈는 그의 ‘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休止)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만 비극적이다.” (시지프의 신화, 민음사, 2016, 182면.)

비극을 의식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 또한 의식이 고통을 제대로 통찰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제대로 통찰하는 것은 비극의 끝을 응시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실존상황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또한 그의 바위를 향해 되돌아가는 시지프를 상상해 본다. 그것은 고통으로 시작되었다. … 엄청난 비탄은 감당하기에 너무도 무겁다. 이것은 우리가 맞이하는 겟세마네의 밤들이다. … 그러나 우리를 압도하는 사실(비극적인 운명)도 인정(인식)하면 사라진다. (같은 곳)

오이디푸스도 처음에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의 운명에 복종한다.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기가 막힌 한 마디가 울린다. “그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령과 나의 영혼의 위대함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고뇌)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 어둠이 없으면 태양도 없는 것이기에 반드시 밤을 알아야 한다.”(같은 곳) 결국 카뮈는 “모든 것이 좋다”라는 오이디프스의 말을 ‘신성한 것’으로, 산정을 향한 시지프의 투쟁을 ‘행복한 시지프’라고 마무리합니다.

케네스 렁(Kenneth S.Leong)은 카뮈의 통찰을 인생의 역설과 반논리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는 카뮈를 깨달은 사람(禪師)이라고 부릅니다. “삶은 고되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 즉 가장 위대한 진리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위대한 진리인 이유는 일단 이 진리를 참으로 알게 되면 그것을 초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단 삶이 고되다는 것을 참으로 알게 되면 다시 말해 그 사실을 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더 이상 고되지 않다. 일단 그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삶이 고되다는 사실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전체론적 시각이라고 부릅니다. (케네스 렁, 예수, 선을 말하다, 진현종 역, 2005, 162-163면)

공자는 만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논어 2:4) ‘지천명‘은 말 그대로 ‘천명을 안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천명을 아는 것은 곧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입니다. (중용 首章. ‘天命之 謂性’) 50세에 공자는 비로소 자신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순’을 말합니다. 이순은 말 그대로 귀가 순하다는 뜻입니다. 귀는 소리를 듣습니다. 60세된 공자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세상의 소리나 혹은 타인의 소리입니다. 혹 자기 내면의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소리나 타인의 소리에서 혹은 자기 내면의 소리에서 제3의 소리를 듣습니다. 바로 천명입니다. 천명은 개인적으로는 ‘운명’이고 세상적으로는 ‘역사’입니다. 천명으로서의 운명과 역사가 더 이상 귀에 거슬리지 않고 들립니다. 실존적 인간으로서의 해탈은 우리와 우리의 운명이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곧 내 운명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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