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 1:2~4)

신상범 목사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새해를 맞은 우리도 신앙을 새롭게 하여 본이 되고 소문이 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교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3주 동안 성경을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생긴 교회(행 17:1-4)입니다. 얼마나 신앙의 본이 되고 좋은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등 각지로 퍼졌는지 바울은 기도할 때 마다 “너희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감사하며 기억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교회나 우리에 대한 소문은 어떤가요? 여러분의 주변에서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어떻게 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새해 삶도 데살로니가교회처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꼭 기억되고 본이 되며 소문이 나기를 축복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를 통해 배우고자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한 마디로 신앙의 기본이 잘된 교회였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본이 중요하다는 말은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천선수촌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각 종목의 운동선수들이 공통으로 하는 훈련이 무엇입니까? 모든 스포츠의 기본인 육상(뛰고 달리고 던지고) 훈련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도 훌륭한 성장을 위해서 기본을 잘 갖추어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은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고전 13:13) 바울은 이 세 가지는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높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한 마디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는 신앙의 기본이 제대로 된 교회였습니다. 단순히 추상적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신앙인의 마음의 정원에 있는 믿음나무와 사랑나무와 소망나무에 역사와 수고와 인내라는 아름다운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도라면 항상 소유해야 할 믿음, 소망, 사랑 이 신앙의 3대 요소는 추상적인 것이 아닌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가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보여야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믿음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형식적이거나 추상적인 믿음의 삶이 아닌 실천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역사’를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produced by faith’입니다. 프로듀서라는 말은 ‘제작자’, ‘만드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새 번역성경에서는 ‘믿음의 행위’라고 표기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으로 행한 일들을 가슴속 깊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었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말로만 하는 입술의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고 역사가 나타나는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고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에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며 죽은 것이며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므로 온전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분명한 믿음 위에 행함이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삶을 항상 기억하고 칭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믿음에 행함이 수반될 때 하나님도 우리의 믿음에 역동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실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믿음의 역사(役事)가 없고 교회의 역사(歷史)만 남은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3주간 머물며 복음을 전한 역사(歷史)가 짧은 교회였지만, 믿음의 역사(役事)가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처럼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은 어디서 납니까? 교회에 출석하면 생깁니까? 아니면 유산이나 유전입니까?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로마서 10:17)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저희 속에서 역사(살전 2:13)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살아서 활력있는 역사를 일으킵니다.(히 4:12)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믿음의 반응,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교회와 삶 속에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둘째, 그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수고라고 단어를 영어 성경에는 ‘일’ ‘노동’이라는 의미의 ‘work’, ‘labour’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감정의 동함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본문에서는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수고와 노동이 따르는 사랑을 말합니다.

참 사랑에는 수고와 노동이 따릅니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가 강인한 이유는 자녀를 향한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수고가 따르지 않는 말만의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도 말로 하지 말고 행함으로 사랑하자라고 했습니다.(요일 3:18)

미국의 단편 소설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병든 유약한 소녀 존시는 모진 비바람에도 끝내 붙어있는 마지막 잎새에 힘과 용기가 생겨 결국 살아납니다. 이는 비바람 치는 추운 겨울밤을 새며 마지막 잎새를 담벼락에 그린 베어맨 할아버지의 사랑의 수고 때문이 아닙니까? 결국 할아버지의 사랑의 수고와 희생이 꺼져가던 존시의 생명을 살려냈습니다.

참 사랑의 수고의 표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십자가에 달려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린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을 향한 사랑임을 알고 사랑의 수고를 마다치 않는 새해가 되길 축복합니다. 

셋째,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인내와 소망은 자전거 바퀴처럼 함께 있습니다. 홀로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소망은 인내를 요구하고 인내는 소망을 이룹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롬 5:4) 소망은 삶에 큰 힘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모욕적인 말은 ‘저 사람은 가망이 없는 사람이야. 소망이 없어’ 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도 아니고 병든 사람도 아니고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키에르케고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희망이 없는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무릇 우리의 소망은 그로부터 나옵니다(시 62:5)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상황이 어떠하던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낙심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소망이 성취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롬 8:25) 말아야 하고 “우리가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의 결론도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신앙의 기본인 믿음, 소망, 사랑이 든든히 세워지고 그 열매들이 역사와 수고와 인내로 아름답게 맺혀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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