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의 수도원적인 경건생활과 진리탐구

송기식은 1958년 2월 서울신학교 입학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의 성적에 학교에서는 교단 목회자 자녀, 극빈 입학생들과 함께 근로 장학혜택을 그에게 특별히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지방의 학생들처럼 기숙사에 입사해서 식사비를 면제 받았다.

한 방에 4인이 침대 하나씩 제공받는 기숙사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반드시 지켜야 할 비교적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그것은 5가지였다.

1) 매일 강당에서 드리는 새벽기도회(06시)는 의무적으로 참석할 것.
2) 수업 외 외출 할 경우 밤 10시 전에 반드시 돌아올 것.
3) 이성 간의 우편편지는 사감이 일차 검열하는 것을 양해할 것.
4) 근로 장학생들은 사감이 지정한 장소에서 소임을 다할 것.
5) 매일 밤 10시 소등 시간을 엄히 지킬 것
 
중세 수도원보다는 덜하지만, 인권이 자유화된 현대사회에 아직도 이런 수도원적 규칙이 있다는 것에 그는 놀랐으나 신학생의 경건생활 훈련이라고 이해했다. 또 거저 주는 것이 아닌 ‘근로 장학생’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이것이 서양문명인들의 생활이었고, 전통적인 기독교적 사고방식이었다.

사도 바울도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사흘에 한 번씩 공동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2학년 때는 마루청소, 3학년 때는 강당청소, 4학년 때는 도서관 사서를 맡아서 일했다. 가난한 미국 성도들이 한국의 가난한 신학생들을 돕기 위해 한 푼씩 모아 보내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봉사했다. 

그러다보니 그냥 받고자 하는 거지근성이 마음에서 사라지고, 댓가 지불이라는 가치관이 생겨나 떳떳했다. 이는 앞으로 그의 삶의 중요한 정신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목회자의 경제적 어려움도 근로의 정신으로 헤쳐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기숙사에서 경건의 훈련에 힘쓰고, 방과 후에는 학교 도서실에서 공부하며 많은 신학서적과 철학서적을 읽었다. 그는 영어 기초가 확립되어 있어서 어려운 원서도 사전을 찾아가며 읽고, 노트에 메모했다. 그런 노트가 일년에 몇 권이 되어 목회생활에 도움 되었다.

그가 2학년 때 틈틈이 도서실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여 독서클럽을 만들기로 했다. 그가 총무로 선임되어 이름을 <리딩 클럽>으로 정하고, 회원 8명이 신간서적 하나씩 읽고 일주일에 하루 모여 발표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므로 지식의 폭을 넓혀갔다.  

이때 처음 참가한 학생들은 강근환, 최건호, 안광춘, 송기식, 김준철, 최희범, 조 만, 백수복 등으로 이들은 진리탐구를 계기로 한결같이 학문연구에 매진하여 나중에 학자나 목회자들이 되어 교단과 한국교회 발전에 공헌했다. 하지만 그들의 졸업과 함께 후배들에게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또한 그는 1964년 9월 초, 서울신대 대학원 재학 중 필자와 함께 교내 ‘석청PEN클럽’을 조직하고,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대학원 교실에서 10명 내외 회원들이 함께 모여 문학작품 발표회를 갖고, 토론으로 이어져 목회자들의 문학적 달란트를 키우는데 공헌했다.

우리는 모임 때마다 한 사람이 준비한 시나 수필, 짧은 소설 등을 발표하면, 그에 대한 소감과 평가를 서로 하면서 문학수련을 했다. 당시 송 전도사는 “풀밭에서‘라는 시를 발표하고, 이 시를 쓴 동기를 ‘어느 시골교회 전도사로서 목회에 대한 열정을 쏟을 수 없는 열악한 현실을 개탄하며 쓴 시’라고 말한 것을 필자는 기억한다. 이 클럽 역시 후배양성에 실패해 임원들 졸업과 동시에 스스로 해산되는 안타까움이 있었으나 보람은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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