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리카의 가난한 병자들과 평생을 함께한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일화 한토막. 어린 시절의 슈바이처가 구유에 뉘어져 있는 예수님을 찾아와 예물을 드리는 동방박사들의 모습을 연극으로 보았다. 그 연극을 보고 슈바이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예수님은 왜, 동방박사들의 보물을 예물로 받고도 가난하게 살아야 했나요?” 이 일화에서 많은 목회자들은 자신의 가난이 그리스도의 명령일 수도 있음을 확인하지 않을까.

▨… 누가복음서는 우리에게 전한다. ‘구주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구주의 표적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의 모습이라니! 그 모습은 그분의 삶이 낮고 가난한 자의 삶으로 일관되게 이어질 것을 예증해주는 선언 아니겠는가. 그렇다. 누가복음서는 2019년 성탄절에 우리에게 다시 오시는 예수님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임을 밝혀 주고 있다.

▨… 예수님의 가난을 닮으려는 믿음이 퇴색될 때 교회가 어떻게 악마화하는가를 보여준 것이 ‘존스타운(Jonestown)의 비극’ 아니겠는가. 누구보다 가난한 자를 섬기고, 소외된 자를 돌보겠다고 외쳤던 짐 존스 목사가 인간적인 욕심에 함몰되었을 때 914명의 집단자살(?)이 강요되고 강행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예수님의 가난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사랑타령 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였던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이웃사랑타령에 젖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가차없이 까발려 준다. ‘조시마’는 고백했다. “나는 인류를 사랑할 수 있지만 내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다”라고. 조시마는 자신과 별다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말만으로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과 손익관계를 따져야 하는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 “저녁상을 물리고 지아비를 기다리며 아가와 함께 읽는 ‘예수의 생애’ /네 눈이 보아내는 참 모습 그대로 네 귀가 들을 수 있는 옛 음성 그대로 /젖먹는 네 입이 처음으로 부르는 위대한 그 이름 /아가야 네게 줄 나의 재산은 오직 그의 이름 뿐이란다.”(류안진, ‘위대한 유산’) 이 시인의 마음이 예수의 오심을 맞는 진정한 믿음 아닐까하고 묻는다면 너무 곁길로 나가고 있다고 그분은 꾸짖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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