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준경(文俊卿) 전도사는 한국교회가 배출한 대표적인 여성순교자다.
1891년 신안군 암태도에서 태어나고 자라 17세에 증도로 시집을 간 문 전도사는 결혼 첫날부터 소박을 맞아 생과부가 됐다. 하지만 전도부인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됐으며 목포 북교동교회 이성봉 목사에게 은혜를 받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으며 전도부인이 되어 훗날 48명의 순교자를 낸 임자도 진리교회와 증도의 증동리교회, 우전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곳곳에 기도처를 세우는 등 섬선교에 헌신했다.

6·25한국전쟁 중 섬에 들이닥친 공산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순교를 당했지만 그 순교의 피로 증도의 90% 이상이 복음화 되는 기적을 일구었다. 뜻있는 인사들이 성결교단에서 순교기념관 건립과 성역화에 뜻을 모으도록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협력을 기대한다.

어이없는 생과부 신세가 되어
문준경은 1891년 2월 2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문재경의 3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소녀 준경은 할아버지가 진사였기에 넉넉한 양반가문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그녀는 천성이 곱고 인정이 많아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하인들에게도 인정을 많이 베풀어 마음씨 고운 주인댁 따님으로 불렸다.

호기심 많고 총명한 그녀는 남자들처럼 글을 배우고 싶어 아버지께 오빠들과 같이 서당에서 공부하게 해달라고하자 아버지는 버럭 화를 냈다. “아니, 밥 먹여주고 옷 입혀주고 편하게 살면 됐지 이 무슨 말이야? 착하고 똑똑해서 귀여워해줬더니 애비 상투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그러는 게냐?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말라.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했느니라.” 아버지의 완고한 반대로 배우고자하는 열망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그의 나이 17세에 신안군 지도면 등선마을의 정근택과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을 꾸기도 전에 남편이란 사람은 결혼하자마자 외방에 나가 몇 달 씩 소식도 없이 지내다가 어쩌다 집에 돌아오면 부모만 뵙고 아내와는 한밤도 자지 않고 말조차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남편의 마음을 붙잡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허사였다. 알고 보니 남편은 목포에서 소실을 얻어 아들딸을 낳고 살고 있었다.

그때 문준경은 자신을 ‘남편 있는 생과부’로 지칭하며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감정을 추스르며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갔다. 시부모도 극진히 섬겼다. 인정이 많고 자상한 시부모는 며느리가 보기 민망스럽고 안타까웠지만 부모 말을 듣지 않는 망나니 같은 아들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 문준경이 애처롭고 안쓰러워 친딸보다 더 사랑하고 보살펴주었다. 그의 총명함을 안지라 그녀가 혼자 어려운 세파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도록 한글이라도 가르쳐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부지런히 공부했다. 그녀는 단시일에 한글을 깨쳐 시아버지는 크게 감탄했다. 한글을 깨친 그녀는 닥치는대로 책을 구해서 읽으며 위안을 얻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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