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 가톨릭에서 ‘내 탓이오’ 운동으로 사회를 참신하게 했습니다. 개신교는 (나라가 어지러워) ‘많은 교회’가 기도회를 한다는데 세상을 밝히는 방법이 이것 뿐인지… 지금은 교회가 전국에서 촛불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하나되어 빛을 발해야 하는 때인데 침묵한다면… 안타깝습니다.” 이 글은 조금 정리했지만 애오개를 늘 애독해 주시는 충남지방회 소속의 어느 은퇴장로님이 보내주신 편지의 한 부분이다.

▨…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을 안겨주었던 가톨릭 교황의 위세와 권위는 십자군전쟁의 종막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교황의 권위를 대신하는 성경 자체의 권위가 신앙인들의 가슴에 자리할 수 있도록 종교개혁자들이 불을 지른 것이다. 같은 성경을 기반으로 해서 신앙을 고백하지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결단과 고백을 요청하는 새로운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다.

▨… 당연히 새 믿음의 사람들은 세속권위와 또 교회와의 관계까지 새롭게 정리하였다. 종교개혁의 선봉이었던 루터는 “로마 교황이나 농부나 하나님이 보시기엔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나치의 만행을 온몸으로 겪은 본회퍼 목사는 그리스도는 “모든 속박을 파괴하는 분”임을 선언하였다. “그분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우리는 가시적인 세상 속으로 구체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신앙인의 결단을 촉구하면서….

▨… 지금도 살아계셔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역사하시며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한 성결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성결을 세속적 삶으로부터의 구별이라고만 고집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교회가 문을 닫아야 했던 아픈 상처 탓일까. 우리 성결교회는 세속사에는 비프로테스탄트적이었다. 그런 모습이 어느 은퇴장로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해 드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다시 기억하자. 루터는 말했다. “구두방 사람이 구두를, 양복점 사람이 양복을 만들 듯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해야 한다.” 이 가르침 탓일까, 어느 신학자도 국가 위기에서 부르짖었다. “이 나라와 민족이 위태롭습니다. 저는 북한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교회성장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안일만을 구했던 우리의 죄를 회개합시다”(김동건, ‘모든 사람에게’) 어느 노(老) 장로님의 염려가 이 한마디에 숨어 있다고 진단한다면 오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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