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현상 배가운동

이종무 목사
1950년대는 주일학교운동가들과 서울신대학 학생동아리 주일학교연구회와 조화를 이뤄 연합회가 확장되고 활기를 띤 시기다. 1954년부터 1955년 어간의 주일학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전국교회주일학교 현상배가운동을 벌였다. 동양선교부에서 성적이 우수한 10교회에 시상을 하고 그 실무를 주일학교연합회가 담당했다. 시상과 상품은 1등 피아노, 2등 확성기앰프, 3등대형오르간, 4등 소형오르간, 5~10등 기독교방송 청취용 휴대용 라디오이다. 장소가 협소한 교회에게는 대형천막을 제공하기로 했다.

제10회 교단총회는 그 실천방안의 하나로 1년에 1회 이상 지방회나 감찰회단위로 교사강습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여 전국교단적인 행사가 되었다. 주일학교전국연합회는 강사를 확보하고 ‘활천’지에 강사소개와 강사알선 안내문을 게재했다. 강습회는 동계(1955년 1월9일~1월23일) 하계(1955년 6월 28일~8월 26일)와 춘계(1956년 3월 1일~3월 31일), 동계(1956년 11월 30일~1월 10일)에 교사강습회를 실시했다. 어린이심리(5시간), 예배지도(5시간) 교수법(5시간), 연구수업(3시간) 유년부조직관리(5시간) 음악과 오락(6시간) 음영교육(6시간)이었다.

전국순회교사강습회는 강사를 3개의 팀으로 편성하여 3차에 걸쳐 실시했다. 강습회의 열기는 전국교회로 들풀의 불길처럼 퍼져나갔고 이로 인해 성결교회의 주일학교가 크게 부흥되었다. 1956년에 주일학교학생이 4만3,138명에서 1957년 12월말에는 5만2,237명으로 무려 1만여 명이 증가했다. 그에 비해 장년신자는 4만8,325명에서 4만9,145명으로 800여 명이 증가한 장년신자보다 10배 이상으로 증가하고 주일학생이 장년신자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주일학교배가운동은 한국성결교회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러 고속성장을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주일학교부흥운동을 통해 복음사역자로 헌신한 자도 많이 나왔고 이들이 교사 청년 남?여전도회 등 각 분야의 핵심적인 구성원이 되어 평신도지도자로서 성결교회부흥성장에 크게 이바지했음을 알 수 있다. 

주일학교부흥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6.25동란으로 의기소침해있던 교회청년들이 신앙열정과 사명을 가지고 활기찬 교회봉사를 했고, 주일학교가 어린이들을 따듯하게 맞아주고 공을 들였다. 성경이야기, 동화, 노래 등은 어린이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주일학교학생들이 모여드는 때였다.

둘째, 연합회책임자들의 열정과 치밀한 계획, 업무추진력, 교통 숙소 등이 열악한 환경에서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며 감행한 희생적인 봉사활동을 성공의 요인으로 들 수 있다. 주일학교운동가의 활동경험과 주일학교교육연구회 출신들로 구성된 많은 강사들을 확보하여 운영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셋째, 총회와 동양선교회가 크게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총회의 독려와 각 지방회, 지역단위의 행정적인 지원과 교회성도들의 침식제공봉사 등 협조체제가 원만하게 잘 이뤄졌기 때문이다.

넷째, 각 교회와 주일학교의 적극적인 참여를 들 수 있다. 전국 교회마다 주일학교부흥을 위해 교사들은 물론 교역자와 온 교우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온힘을 기울였다. 다섯째, ‘어린양’ 기관지의 매체가 크게 기여했다. ‘어린양’은 주일학교전국연합회의 기관지와 교사를 위한 잡지로서의 매체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감당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기독교계의 유일한 교사 잡지 ‘어린양’은 50년대 성결교회의 주일학교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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