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이 말하라는 대로 말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장사할 때는 별도로 해주십시오. 주님이 가라는 대로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만큼은 매주일 가라고는 안하시겠지요? 주님이 바치라는 대로 헌금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체면유지 정도로 조종해 주십시오. 주님이 지라는 대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렇지만 짐꾼을 사서 대신 지게해도 그게 그거겠지요? 주님이 사랑하라는대로 사랑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당장 하라고는 마시고 내일로 미루어 주십시오.”(어느 기도문, 최효섭, ‘당신은 누구입니까’에서 재인용)

▨… 이 기도문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비아냥댄 것이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기도문을 읽는 사람들은 마음이 아플 것이다. 삶이 제 뜻대로 되지 않으니 신앙생활도 뜻대로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핑계대면서도 부끄러움만은 감출 길 없어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부끄러움을 확인사살자의 행동처럼 어느 신문이 한사코 상기시켜 주었다.

▨… “이제 내가 나이 아흔을 넘었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저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갈 거는 40~50년 된 손때 묻은 이 성경책 하나예요. 혜진아(딸을 보며) 이걸 나랑 같이 묻어다오.”(중앙일보, 2019년 11월 12일자) 500억 원을 기부한 91세 배우 신영균의 믿음을 부러워하는 신앙인이 과연 이 땅에는 몇 명이나 있을까.

▨… 아니다. 노배우 신영균의 신앙을 부러워하는, 그러면서 자신의 신앙을 부끄러워하는 평신도 신앙인이 몇 명쯤일까를 묻는 것으로는 한국교회의 내일은 결코 밝아질 수 없다. 한국교회를 위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면 그것은 노배우의 신앙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는 왜 없는가를 한탄하지 않는 목사는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 그 신영균이 고백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0)이라고. 사도 바울의 고백을 따른 신영균의 고백은 신영균만 할 수 있는 고백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를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로 알고 그 십자가 아래 무릎 꿇는 모든 목사들의 하나같은 고백일 것이다. 큰 교회 목사의 “나의 나 된 것”과 작은 교회 목사의 “나의 나 된 것” 사이에 어떤 모양이든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빚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한 자들이 자기 낮춤(Humility)을 외면하므로써 빚어지는 결과일 뿐이다. 이 결과가 지금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