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두 목사
치밀한 매뉴얼에 의해 자신만만하게 진행되던 현 정권의 체제 교체 패러다임이 이제 겨우 정권의 임기 전환점에 중대 기로에 섰다.

야권의 강력한 저항이나 새로운 대안세력의 대두로 인한 것이 아니라 정권 내부의 모순에 의한 것이니 참 아이러니하다. 아니다. 애초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체제를 청산해야 할 ‘낡은 체제’로 단정하고 새로운 체제에로의 이행을 정당화할 때 이미 정권의 이념 안에 내재된 모순이었다.

선악의 이데올로기로 현실을 재단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인간 본성에 대한 무지이자 반역이기 때문이다.

이미 일반 대중은 전 정권과 그 패거리들의 오만과 불통에 가슴앓이를 경험한 바 있다. 그들을 적폐로 규정하고 정죄한 현 정권의 오만과 위선은 그래서 더 심각하다.

실제로 민심의 이반과 역풍은 거세다. 심각한 민심이반은 현 정권의 존립근거를 붕괴시킬 뿐 아니라 집권 후를 우려하게 한다. 매뉴얼에 없는 심각한 무리수가 동원될 개연성이 있다.

조국 사태는 정권의 정직성과 공정성의 위기다. 전자는 정권 담당자들의 인성의 문제이고 후자는 정권의 이념적 가치의 문제이다. 현실에서 양자는 기묘하게 얽혀있다.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그들의 모토는 자칫 기만의 수사학으로 전락될 위기에 처했다.

그 와중에 한 시대 주류담론을 주도하던 소위 좌파 이데올로그(ideologue)들의 추락이 처연하다. 그들의 말과 글은 이제 더 이상 일반대중에게 공감과 울림을 주지 못한다.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그들의 말과 글은 현란하지만 찢겨져 나부끼는 깃발이다.

궤변과 요설은 이념과 정파에 상관없이 인간 일반의 양식에 배치된다. 그들은  너무 일찍 말(논리)이 권력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공고하게 그들만의 문법 카르텔을 형성했다. 돈과 명성은 부수적이었다. 그들은 대중을 그들이 마음대로 선동하고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의 몰락은 그들의 말(과 글)이 특정 이념과 정파를 위한 도구로 기능할 때 이미 정향되어 있었다.

“목적이 선이면 수단이 무엇이건 선이라”는 명제는 20세기 초에나 통할 망상이다. 말은 그 자체에 가는 길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말길이라 부른다. 말길의 근본은 정직성이다. 대중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지속적으로 어리석지는 않다.

자기 자신의 자생적, 자각적, 자성적(自生的·自覺的·自性的) 로고스가 아니라 단지 망녕들린 나(패거리)를 위하여 남을 기만하고자 거짓 지혜를 행상하는 떠벌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소피스트라고 부른다. 지혜 사랑(philosophia)은 바로 저러한 말장난에 의한 ‘지식 자랑’의 궤변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나 겨우 움틀 수 있는 것이다. ‘지혜 사랑(philosophia)’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식 자랑’에 상극적인 것이다. 지식 자랑과 지혜 사랑의 차이가 어찌 서구적 전통 만일까?

동양의 지혜 역시 ‘위인지학’과 ‘위기지학’을 구별하였다. (『논어』 헌문편,“子曰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 위인지학은 말그대로 스펙을 쌓기 위한 학이다.

위기지학은 자신을 닦는 학이다. 자신을 닦아 예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극기복례‘다.(『논어』안연편“顔淵 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그 뿐 아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대학』8:1) 수신의 본질은 ‘벽(치우치다, 편벽되다, 공평하지 못하다)을 피하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공정(성)이다. ‘수신(修身)’은 私가 아닌 公의 마음을 닦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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