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 투병 중인 남편을 간호하며 레베카 스크러튼은 인근의 교회를 찾아 간증하며 노래를 불렀다. 성악가가 꿈이었던 이 젊은 흑인 여성의 찬양과 간증에 많은 사람들이 큰 감화를 받았다. 투병의 보람도 없이 남편이 죽자 유언에 따라 장례식에서 레베카는 노래를 불렀다. 조객 중에 예수를 믿겠다고 두 사람이 결심을 밝혔다. 한국에서 군속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딸을 위로하려고 비행기표를 보냈다. 레베카를 태운 KAL기는 소련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당했다. 1983년 9월 1일이었다.

▨… 뉘라서 이 일에서 신앙의 답을 연역해낼 수 있을까. 자신을 꼼짝할 수 없도록 옭는 시련을 오직 신앙으로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딸을 위로해 주려고 보낸 아버지의 비행기 표 한 장이 딸의 죽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던 이 기막힌 인간사를… 사람들은 묻는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닥쳐오는 시련을, 시험을 모르시는 체하시느냐고… 아무도 그 답을 마련해낼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 최효섭 목사가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마련했던 적이 있다. “레베카 스크러튼은 28세에 한번 죽은 것이 아니다. 여러 번 죽은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며 고통과 싸우는 것이나, 참고 견디는 것이나, 때로는 자기의 욕구를 억제하고 포기하는 것이나 희생하는 것들은 모두가 죽는 경험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속에서 다시 사는 것이 하나님과 임대계약을 맺은 시간을 꽃피우는 것이다.”(설교 ‘새 임대계약’ 참조)

▨…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부르짖으셨다.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놓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가 무슨 언어로 연역해내어 설명할 수 있을까. 칼 바르트의 표현대로 “우리는 그분이 보여주신(계시해 주신) 것 만큼만 알 수 있을 뿐” 아니겠는가.

▨… 순교자기념주일을 지켰다. 교단이 정한 기념주일이니 지키는 흉내만 냈을 뿐 순교정신을 우리 삶에서 구현하려고는 애초에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다. 너무 솔직한 고백인가. 과학기술이, 맘모니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삼켜버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삶을 결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의 순교는 이 자신을 포기하는 삶에서 시작된다. 이 결단에서만 그리스도는 다시 사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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