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와 평신도의 사이는 조화와 상생의 사역 협력관계이다. 다시 말하면 교역자는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세상에 나가 활동할 동력원을 공급해 주고, 평신도들은 교역자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세상 곳곳에 깊숙이 파고들어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수행한다.

평신도 사역의 장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교회, 곧 ‘모여 있는 교회’(에크레시아)요, 또 하나는 세상, 곧 ‘흩어져 있는 교회’(디아스포라)이다. 평신도가 ‘모여 있는 교회’에 있을 때에는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말한 대로, 평신도는 (교역자를 도움으로써) 교역자와 더불어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된다.

또 평신도가 ‘흩어져 있는 교회’에 있을 때에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말씀하신 그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자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적극적으로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자가 된다.

평신도의 본격적인 사역의 장은 세상이다. 가정도 직장도 거리도 모두 평신도들이 각기 인격과 생활 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곳이요, 평신도가 사회에서 날마다 부닥치는 모든 경우와 사건이 곧 선교의 기회이다. 과거에는 죄에 물들지 않기 위해 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복음을 위해 세상 속으로 깊이 뛰어들게 됐다.

현대 교회가 ‘흩어져 있는 교회’를 발견한 것은 기독교 시대 이후의 최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크레머의 말과 같이 지금까지 동결된 평신도라는 엄청난 인적 자원이 백퍼센트 유통 자금화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평신도가 총동원되어 기독교 인구 배가의 방법으로 나아간다면 전 세계 신자화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한국교회 평신도 운동은 교회 갱신 운동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 뿌리를 박고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는데, 만일 그 토양이 병들었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평신도 운동에서 교회갱신이 강조되는 이유다. 요즘 어느 대형교회처럼 목사세습 분쟁으로 교회에 대한 사회의 호감도가 떨어져 이것이 선교의 역기능으로 작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평신도가 활동할 무대요,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다. 후켄다이크는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하여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함께 세계를 위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의 한국교회, 교회를 위한 교회의 패턴에서 벗어나 세상 안에 있는, 세상을 위한 교회로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신도가 세상에서 ‘흩어져 있는 교회’로서의 산 활동이 있을 때 비로소 ‘모여 있는 교회’의 존재 이유가 뚜렷해진다. ‘흩어져 있는 교회’로서의 활동이 없다면 ‘모여 있는 교회’는 전선 없는 군대와 같고, 갇혀 있는 용사와 같이 될 것이다. 교황 비오 12세는 “평신도는 곧 교회다. 그들이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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