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꽃길 걸으며 선교 역사를 곱씹다

▲ 순례지도
매곡동(梅谷洞)은 매화계곡이라는 뜻이다. 옛날 순천에서는 ‘저우실’이라 했다. 겨울계곡(冬谷)이라는 의미다. 매화는 눈 속에서 피는 꽃이다. 검게 변한 대지는 죽은 것이 아니다.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겨울과 매화가 서로 어울려서 매곡동이 되었다.
조선 말기에 우리 민족은 근대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자주적 근대화 노력은 일제의 총칼 앞에 무릎 꿇는다. 일제는 식민지 근대화를 강요한다. 보성 선비 조상학이 순천에 복음을 전한다. 1906년 순천읍교회(현 순천중앙교회)를 개척한다.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서 과감하게 근대로 발을 들인다. 신앙으로 일제에 항거한다.
1913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순천 매곡동 매산등 선교사마을에 들어온다. 순천사람들은 근대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인다. 해방을 맞는다. 좌익과 우익의 경계에 선다. 여순사건이 일어난다.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린다. 좌익과 우익의 경계에서 사랑을 선택한다. 신앙으로 모든 죽임에 항거한다. 순천에 사랑의 원자탄이 터진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극복한다. 전국에서 기독교인이 제일 많은 도시인 순천이다. 봄 볕 내리던 날 붉은 매화만큼이나 기이하고 고운 순천 꽃길을 걸었다.


▲ 매곡동 매화길
선교사 마을 ‘순천 매곡동’
1913년 프레스톤과 코잇 선교사는 광주에서 순천으로 내려와 북문 밖 매산등, 곧 매곡동 언덕에 순천선교부를 개설한다. 전주·군산·목포·광주를 거쳐 오는 동안 노하우를 쌓았다. 그래서 순천선교부는 다른 지역 선교부와 달랐다. 다른 지역에서는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들어가서 선교부를 건설했다. 순천에서는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먼저 선교사마을을 조성한 뒤 선교사들이 들어갔다. 순천에 최초로 서양건물 프레스톤 사택과 여러 채 선교사 사택을 짓는다. 묵상의 숲 속 저수탱크에 물을 모아서 상수도 시설을 갖춘다. 1913년 존 커티스 크레인 선교사는 매산학교를 개교한다. 1916년 로저스 선교사는 알렉산더 병원을 개원한다. 근대 선교사들이 터를 잡은 매산 언덕 선교사마을은 교육시설·의료시설·상수도시설·하수도시설·전기시설 등 도시기반시설을 모두 갖추면서 마을을 확장해 가는 근대도시의 상징이었다.
순천사람들은 이곳을 무덤자리로 기억하고 있다. 선교사들이 들어 온 뒤 근대도시로 탈바꿈한다. 순천의 근대는 이렇게 시작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이식한 근대가 아니다. 호남사림의 진원지 순천은 근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토양 위에서 순조롭게 선교사마을을 조성한다.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
매곡동 메모리얼 파크 계단을 올라가면 매산중학교 담장을 마주한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기독진료소,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공마당네거리다. 네거리에서 계속 직진해서 골목길로 들어서면 애양원 재활병원 및 직업보도소와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이 연이어서 나온다. 매산학교를 말할 때 크레인가를 떠올리 듯이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과 기독진료소는 린톤가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린톤가 4대에 걸친 한국선교는 1912년 윌리엄 린톤(한국명 인돈)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대전 한남대학교를 설립한 윌리엄 린톤은 광주선교부를 개척한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렛 벨(한국명 인사례)과 결혼한다. 윌리엄 린톤의 넷째 아들 드와이트 린톤(한국명 인도아)은 호남신학대학교 학장을 역임한다. 윌리엄 린톤의 선교사업을 이어받은 사람은 휴 린톤(Hugh Linton, 1926~1984, 한국명 인휴)으로, 1926년 선교지 군산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다. 1940년 아버지 윌리엄 린톤과 함께 추방당한 휴 린톤은 1945년 미 해군 장교로 입대하여 일제에 맞서 싸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다. 휴전과 함께 전역한 휴 린톤은 1954년 순천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다. 전남과 경남 남해안 지역 그리고 호남 내륙에 200여 개 교회를 개척한다.
휴 린톤의 아내 로이스 린톤은 순천기독결핵재활원(현 순천기독진료소)을 설립한다. 세 아들이 결핵에 걸려서 생사를 넘나드는 와중에도 결핵퇴치 사업을 계속한다. 지금도 이 사업은 진행형이다. 그 현장이 바로 순천기독진료소다. 결핵퇴치사업을 물려받은 둘째 아들 스테판 린톤(Stephen Linton)은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결핵퇴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79년 이후 북한을 80여회 방문하고 김일성과도 두 차례 만났다. 북한 내 12개 종합병원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선교 이야기와 린톤가 4대에 걸친 한국선교 이야기는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에 오롯이 남았다.

▲ 순천중앙교회 100주년 조형물
목욕탕집 슬픈 가족사 품은 행동골목길
박물관을 나와서 매산길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간다. 공마당길을 5분 가량 걸으면 오른쪽 언덕 위에 순천 박씨의 시조 박영규 장군의 후손 박난봉 장군 묘가 있다. 다시 공마당길을 걸어서 끄트머리 사거리 월드제화를 끼고 직진하면 옥천이다. 순천에는 하천이 두 개 흐른다. 동천과 옥천. 그래서 삼산이수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옥천 오른쪽 옥천서원이다. 무오사화로 순천에 유배를 와서 생을 마감한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하고 있다. 다시 월드제화 앞 네거리에서 오른쪽 옥천길로 70미터 가량 들어가서 왼쪽 금옥길 골목길로 접어들어서자마자 다시 왼쪽 좁은 골목길로 걸어가면 순천향교 후문이다. 순천향교 후문으로 들어가서 정문으로 나와 홍살문을 지나면 호날길. 호남길 왼쪽으로 걸어가면 순천읍성 서문터 사거리다. 사거리 오른쪽 문화의 거리에서 도로를 건너 좁은 골목길로 들어간다. 금곡길에서 행금길로 이어지는 행동골목길이다.
1949년 8월 15일 동제를 실시하면서 행동과 금곡동을 합쳐서 행금동이 되었다. 행동골목길은 서문성곽 골목(금곡길 30-42)과 행금목욕탕 뒤안길(행금길 18-24)까지 180미터밖에 되지 않는 짧고 좁은 골목길이다. 행동골목길은 길보다 목욕탕이 더 유명하다. 마땅한 건물이 없던 시절 굴뚝 높은 목욕탕은 좋은 이정표 구실을 했을 것이다. 행동목욕탕집 김 모 씨가 남겨놓은 구술자료는 이 골목길을 찾는 이에게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역사를 전한다. 순천이 겪었던 아픈 근대사다.
김 모 씨는 행동목욕탕집 딸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변호사였던 삼촌이 순천에서 개업하면서 순천으로 이사를 왔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행동에 있는 목욕탕을 경영했다. 해방 2년 전 결혼해서 남편을 따라 만주 봉천으로 갔다. 남편은 대만계 일본인 ‘하세’가 경영하는 일본기계제작소에서 일했다. 김 모 씨도 일본기계제작소 경리 일을 봤다. 남편 소개로 순천 사람 정기주 씨도 같이 일했다. 정 씨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청진형무소에서 막 풀려난 사람이다. 남편과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정기주 씨는 언제나 의로운 사람이었다.
해방되던 날 김 모 씨 가족은 조선사람 20명과 함께 봉천역을 출발했다. 여드레 만에 순천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정기주씨는 민청(좌익) 활동을 했다. 김 모 씨는 성악가 오경심씨 등과 함께 여성동우회 활동을 했다. 여순사건 당시 여성동우회는 여수 제14연대 병사 급식대 활동을 했다. 사흘 뒤 시동생(중도우파)은 집 앞에서 진압군에게 총살당했다. 정기주씨는 순천경찰서에서 고문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임신 중이었던 김 모 씨는 군사재판에서 5년 형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전주형무소로 이감되어서 오경심 씨와 정기주 씨 동생 정기태 씨를 만났다. 다시 안동형무소로 이감됐다. 김 모 씨는 1951년 수감자 선교를 하던 목사님 도움으로 석방됐다. 고향 순천으로 돌아와 보니 행동목욕탕을 경영하시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남편은 빨치산으로 산에 들어갔다가 자수해서 1950년 출감했다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결로 볼 수 있을까? 좌익과 우익의 대결이고, 민족주의와 친일의 대결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순천과 여수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반란군을 도운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 공산당이라는 색안경으로 보면 모든 것이 금기가 되어버린다. 이제는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유야무야 덮어서 될 일이 아니다. 이곳을 선교역사 현장으로 보존해야 할지 아니면 여순사건 현장으로 보존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 해야겠다.

찹쌀떡 화월당
창작아트센터를 나와서 오른쪽으로 곧장 걸어가면 도로 건너편에 중앙시장이다. 중앙시장 입구 왼편 도로가에 화월당이 있다. 롤카스테라와 찹쌀덕 두 가지만 만든다. 예약하지 않으면 추가로 만든 빵만 살 수 있다. 오후 4시 경이면 화월당은 썰렁하다. 빵은 다 팔렸다. 주인은 주문한 고객이 빵을 찾아가기만 기다린다.
화월당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일본인 고바야시가 처음 문을 열었다. 1928년부터 점원으로 일하던 조천석 씨는 해방과 함께 화월당을 인수한다. 열다섯 나이에 취직하던 해였던 1928년으로 화월당 창립년도를 정정한다. 하지만 가게는 1920년 그 때 그 자리에 그 대로 있다. 프랜차이즈 빵집이 하나 둘 씩 생기면서 폐업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순천 명물이 됐다.
맛집으로 소문난 비결은 20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사람들이 다시 옛맛을 찾으면서란다. 골목상권까지 치고 들어 온 대기업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 손님들 입맛이 한 번 더 변해서 원점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비결은 옛날 그 맛! 요즘 빵과 달리 달지 않다. 그냥 술술 넘어간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 대기업이 빵 만들고 커피 장사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 재벌기업은 온갖 걸 다 한다. 동네 골목길은 그대로 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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