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환경이 어지럽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전쟁 여파로 세계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정세는 그 어느 나라보다 복잡하게 꼬여있다. 한국과 일본의 외교·경제 갈등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고, 한미 관계도 동맹보다는 국익이 우선이며 어떤 것도 국익에 우선하는 것은 없다는 논리가 매일 워싱턴에서 흘러나오는 중이다. 방위비 분담금 압력이 폭탄급으로 몰려올 기세다. 남북관계도 계속적인 잡음이 흘러나오며 뚜렷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더욱 심각하다. 여야의 대립은 남북관계보다 거칠고, 대일 관계보다 심하면 심하지 약하지 않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청문회 개최 여부를 둘러싸고 보름 이상 국정이 마비되고 있으며, 여야의 협치는 불가능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대통령을 향해 “총살감”이라는 막말을 퍼붓는 정치인까지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에 이런 어려움을 감싸고 해소시켜줄 어떤 제도적 장치도, 정치세력도, 화해를 유도할 어떠한 지성적인 인적 자원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고학력 인적자원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 자랑했던 우리사회가 논리와 지성을 벗어던지고 언제부터 이렇게 막무가내로 치닫게 되었는지 난감한 나날이다. 

그런 암울한 국제 정치 상황, 경제 상황 가운데서도 추석은 여전히 다가오고 있다. 다음 주 초부터 3천만 명에 육박하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핵가족 단위의 삶에서 일가친척들이 만나는 더 큰 단위의 만남이 형성될 것이다. 우리 전통의 공동체 만남이 이루어지면 서로 나누어야 할 인사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삶은 일가친척일지라도 왕래와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예의범절을 지키면서도 적당한 인사말을 찾기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친척 어른이니까 집안의 젊은이들에게 현실적인 관심을 보인다고 “공부 잘하니?” “취직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지?” “결혼은 언제 할 계획이냐?” 등등의 질문을 하면 이런 질문은 대체로 당사자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추석 명절 가족 친지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한다. 사회가 어려울수록 우리는 먼저 가족에게서 우러나오는 힘을 얻어 똑바로 서야 한다. 우리를 본질적으로 바로 서게 하는 것은 부모형제나 고향과 같이 우리라는 존재의 탄생과 관련된 근원적인 힘이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아 힘을 얻고 성찰케 하는 텍스트나 인물이 부족한 지역사회에서는 가족이 1차적인 힘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명절은 중요하다. 가족들과의 만남을 통해 흐트러진 힘을 모으고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크리스천에게는 태어나고 자란 공동체와의 만남과 예배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처럼 감격스럽다. 어른들은 먼저 나서서 젊은이들을 보듬어줘야 한다. 성경은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 133편 1절)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는 기쁨을 노래한 이 시는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3절)로 이어진다. 높은 산을 적시는 이슬은 벌판의 생명수가 된다. 그것을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증언해 왔다. 사회가 어려운 때일수록 신앙의 깊이를 회복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굳게 하는 일, 이것이 이번 추석에 크리스천들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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