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장성한 후에 ②
살다보면 “왜 이렇게 된 거지?”라고 할 만큼 삶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불안해 하며 심지어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도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깊은 낙담에 빠지곤 합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기껏해야 동족을 위해 애굽 사람 한명을 죽이고 살인자의 신세로 전락하여 40년간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장성한 후에’(히. 가달, 출 2:11) 일어난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앞으로 행하실 계획을 암시하셨듯이 하나님은 우리 삶의 조각난 부분을 통하여 삶 전체를 계획하십니다. 비록 조각난 부분의 삶은 이해가 되지 않고 우리를 좌절케 합니다만, 전체를 놓고 보면 놀라운 걸작품을 계획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의 정치가 아닌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안에 있습니다. 비록 인간은 한계가 있고 나약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아버지께 가실 때가 되자 제자들은 낙심이 되었고 불안했습니다. 그 때 홀로 남겨질 제자들을 향해 하신 주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였습니다. 여기에서 ‘거하라’라는 말은 헬라어의 ‘메노’를 번역한 말인데, 이 말은 헬라인들에게 매우 친근하고 마음에 쉽게 와 닿는 말씀이었습니다.
‘메노’(거하라)라는 말씀은 ‘관계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그들에게 “두 사람이 어떤 사이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관계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가 있습니다. 알지만 대면 대면한 사이가 있습니다. 서먹한 사이입니다. 조금 아는 사이가 있습니다. 식사 한 끼 정도는 같이 할 수 있는 사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같이 살 수 있는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이는 같이 있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사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에서 ‘거하라’(헬. 메노)는 말은 이런 관계를 의미합니다. ‘매우 친밀하여 떨어지면 죽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지와 포도나무를 예로 드셨습니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그렇습니다. 홀로 남겨질 제자들에게 주신 이 말씀은 앞으로 그들이 이 세상을 복음으로 살아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거함’으로써 (헬. 메노, 요 15:4) 구원의 삶을 살아 낼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열매’가 아닙니다. ‘주님 안에 거하느냐’입니다. 만일 주님과의 친밀함이 없다면 결국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불에 던져짐을 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 없이 세상과 역사를 보면 언제나 절망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보면 언제나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모세의 삶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록 그가 궁전에 있었다고 하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후에’(가달. 출 2:11) 일어난 모세의 실패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비록 우리의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들, 에너지, 없었으면 하는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쓰여진 소중한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