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2:41~44)

오늘 본문의 장면은 참 부담스러운 장면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다가 여인들이 들어 올 수 있었던 이방인의 뜰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 걸터앉아서 사람들이 성전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들이 와서 헌금함에 헌금을 넣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웅큼 넣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자루로 가지고 와서 쏟아 부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과부가 두 렙돈,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따로 불러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절)
아니 누가 봐도 부자가 자루로 부을 때 한참을 부었는데 과부가 많이 넣었다니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왜 제자들을 따로 불러다가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자들에게 헌금 많이 하라고 가르치려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제자들을 따로 불러 말씀하셨을까요?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셈법은 우리의 셈법과 다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고 고백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여겨주심’에 대한 말씀들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아브람과 관련된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여겨주심의 은혜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람이 언제 의롭다 여겨졌습니까?

창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는 내용입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람이 엘리에셀을 자신의 상속자라 말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어 하늘의 별을 보여 주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니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이 이를 믿을 때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겨 주십니다.(창 15:6) 율법을 지켜서가 아닙니다. 율법은 400년 뒤에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할례도 아닙니다.(창 17:10~14)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의 여겨주심입니다”
내가 의로워서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의롭다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똑똑하고 잘나서 하나님께서 내게 직분을 맡기셨습니까? 아닙니다. 충성되이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헌금 많이 해서 물질 축복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드린 두 렙돈을 하나님께서 가장 큰 것으로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떡 2개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열두 바구니로 남겨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여겨주심의 은혜가 깨달아졌다면 나의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 마저 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깨달아졌다면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 지고 묵묵히 따라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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