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사회로 가는 양림동 길

1905년 일본은 한국을 합방한다. 일본은 조선에서 식민지 근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1945년 일본군은 섬으로 돌아가고 그 빈자리에 미군이 들어온다. 서구적 근대화가 시작된다. 도움을 받던 나라 대한민국이 도움을 주는 나라 대한민국으로 발돋움한다. 그러나 자주적 근대화의 과제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는다.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일제가 이식한 근대는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인가 아니면 자주적 근대화를 좌절시킨 만행인가? 착잡한 마음을 쓸면서 근대사회로 가는 길 양림동을 걷는다.

▲ 양림동 산책길
대륙을 지켜 조국에 광복을 : 정율성거리
광주지하철 남광주역 2번 출구를 빠져나와서 광주천 건너 고가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동상이 하나 있다. 중국 3대 음악가 중 한 명인 정율성 흉상이다. 왜 양림동에 중국 음악가의 흉상이 있을까?

1945년 9월 2일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은 항복문서에 서명한다. 9월 3일 중화민국은 일본의 항복문서를 접수한다. 중국은 이 날을 전승절로 삼고 있다. 2015년은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로 중국은 9월 3일 전승절 행사를 성대하게 치른다.

하이라이트는 신진핑 주석의 열병식. 시진핑 주석이 탄 무개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첫 음악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정율성이 작곡한 곡이다. 정율성은 중국 사람이 아니다. 한국 사람이다. 양림동 사람이다.

정율성(鄭律成, 1914~1951)은 정해업(鄭海業, 1873~1931)과 최영온(崔永瑥, 1873~1964)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양림동에서 나고 자라 화순 능주초등학교와 양림동 숭일학교 그리고 전주 신흥학교 등에서 공부한다. 독립운동과 기독교신앙. 정율성이 태어난 친가와 외가의 공통점이다.

어머니 최영온은 최흥종 목사의 누나다. 최흥종 목사의 동생 최영욱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광주기독병원 원장과 전라남도 초대지사를 역임한다. 작은 외삼촌 최영욱과 맏형 정효룡은 광주 학생 YMCA를 조직했다.

의열단이 남경에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1934년 졸업한 정율성은 남경 고루(鼓樓)전화국에 침투한다. 상해와 남경을 오가는 일본인 전화를 도청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정율성은 조선의 독립과 중국의 항일전 승리는 하나라고 생각했다.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우선 일제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마지막 보루 중국 대륙을 지키려 했다.

▲ 정율성 거리
1951년 1월 정율성은 중국지원군 제3차 작전에 참가하여 서울로 간다. 폐허가 된 서울거리를 떠돌다가 버려진 책무더기 속에서 조선궁중음악 2부 8집 고전악보를 발견한다. 당시 발견된 고전악보는 1996년 부인 정설송이 방한하면서 우리 정부에 기증한다.

1958년 대약진운동이 일어난다. 예술작품을 만들기 전에 직접 생산현장으로 내려 가 체험하려는 것이다. 농촌으로 가서 강철제련운동에 동참한다. 그러나 결국은 우경 반당 혐의를 뒤집어쓴다. 1962년 제7차 인민대회를 끝으로 혐의를 벗기는 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또 다시 집중훈련반에 배치되어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사상교육을 받는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한데 이어서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도 종지부를 찍는다. 중앙악단 당서기로 복직한 정율성도 12월 사망한다.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 오웬기념각
양림교회 십자가 높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 멋진 벽돌 건물이 나온다. 네모난 건물인데 유난히 문이 많다. 정방형건물 모서리를 중심으로 좌우를 나눠 남녀출입문을 달리한 ‘오웬기념각’이다.

숭일학교 남학생들은 왼쪽 출입문, 수피아여학교 여학생들은 오른쪽 출입문으로 드나들었다. 남녀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조선사람들을 배려한 건축이다. 선교사들이 대장(Captain)이라 불렀던 토목기술자 스와인하트(L. M. Swineheart)가 지은 건물이다. 당시 광주는 물론 인근 고을에서도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 오웬기념각
1918년 최흥종 목사의 동생인 의사 최영종과 결혼한 김필례는 1920년 오웬기념각에서 ‘김필례음악회’를 개최한다. 광주에서 처음 열린 음악회다. 1921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교포음악단이 오웬기념각에서 공연을 한다. 남녀가 쌍을 이뤄 사교춤과 탭댄스를 추는 공연이었다. 남녀 출입문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 휘장을 쳐서 남녀가 서로 볼 수도 없었던 시절이다. 서양문화와 유교문화가 충돌한다.

목사이자 의사였던 오웬은 1898년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한다. 광주선교부를 개설한 1904년 12월 24일 유진 벨과 함께 양림동에 도착한다. 1909년 3월 28일 일요일 아침 장흥 전도여행 중 앓아눕는다. 이튿날 조선신자들은 오웬 선교사를 가마에 태워서 산 세 개를 넘어 60리 떨어진 장흥읍에 도착한다. 다음 날 아침 가마꾼을 구해 뛰다시피 해서 130리를 더 간다. 새 가마꾼을 사서 밤새 70리를 또 달린다. 수요일 새벽 2시에 양림동에 도착한다. 상태가 호전되는 듯 했으나 토요일 아침 급격하게 악화된다.

의료선교사 윌슨 의사는 급히 목포선교부에 있는 포사이드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포사이드는 다 죽어가는 한센환자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양림동 언덕에 도착한다. 그러나 오웬은 “나에게 조금만 휴식을 주었으면”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난다.

오웬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William Owen) 밑에서 자란다. 오웬은 할아버지 기념병원을 짓고자 했으나 성경을 가르칠 건물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농한기인 겨울에 일주일 또는 한 달씩 성경학교를 열었다. 200리나 300리 떨어진 곳에서 북문 안 양림리교회를 찾아 온 조선신자들은 성경공부가 끝난 뒤 교회 처마 밑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서 교회에 다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웬은 무척 안타까웠다. 오웬이 떠난 뒤 미국에서 건축기금 4,000달러가 도착한다. 1914년 드디어 오웬기념각을 완공한다. 좌우 출입문 위 현판에는 “In Memory of William L. and Clement G. Owen”(윌리엄 오웬과 클레멘트 오웬을 기념하며)라고 쓰여있다.

▲ 조아라기념관
광주 어머니 : 조아라기념관
소심당 조아라(曺亞羅, 1912~2003)는 전남 나주군 반남면 애안리 조형률 장로와 김서운의 둘째 딸로 태어난다. 태어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여자선교사 안나가 심방을 와서 자신의 이름을 준다.

아버지는 안나를 한자로 바꾼 아라(亞羅)를 호적에 올린다. 아버지 조형률 장로는 고향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에 교회를 세운다. 조아라가 졸업 할 무렵 양림동으로 이사를 하고 양림교회 장로가 된다. 집안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큰아버지다. 양림동 광주선교부에서 선교사를 도와 장로로 일했다.

조아라는 1927년 김필례 선생에게 감화를 받고 광주YWCA 학생 회원으로 가입한다. 1931년 수피아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한다. 졸업과 동시에 선교사 쉐핑이 설립한 이일학교 교사로 일한다. 1933년 수피아백청단 주모자로 연행되어 사직 당하고 투옥된다.

1935년 이택규 전도사와 결혼한다. 1937년 평양신학교 2년 이택규 전도사는 장로회 평양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도 모자라 ‘교회가 모금해서 일제에 비행기를 사주자’고 결정하는 것을 보고는 자퇴한다. 이택규 전도사는 광주로 내려와서 피신하던 중 진성장티부스로 사망한다. 조아라는 보성읍교회가 설립한 사랍학교 교사로 봉직하던 중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투옥된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수피아여학교 총동창회 회장에 피선된다. 전국 장로교 학교 중에서 가장 먼저 수피아여학교를 재건하고 교사로 일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또 다시 투옥된다. 감옥에서 얻은 좌골신경통으로 여생 내내 고생한다. 2003년 7월 8일 92세를 일기로 소천한다. 광주는 민주시민장으로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장로를 떠나보낸다. 김준태 시인은 조시 <님은 하느님의 착하고 부지런한 어린 딸이었습니다 - 조아라 장로님, 조아라 어머님의 영전에 부쳐>에서 조아라를 이렇게 기억한다.

쫓기는 젊은이들을 치마로 감싸 쓰다듬어주고
자신의 흰 저고리를 찢어 상처를 동여매주고
그들 젊은이와 함께 불길에 갇혀 울고 울었던
외롭고 가난한, 아픈 사람들의 벗 - 못 잊을 첫사랑이여

▲ 선교사 묘역.
신앙과 근대사회 : 선교사묘역
커티스 메모리얼 홀 앞에서 굽은 골목길을 따라 오르막을 오른다. 오른쪽에 있는 헌틀리 선교사 사택을 지나서 기독간호대학교 기숙사와 선교원 건물을 가로질러 올라간다. 언덕 맨 위에 올라서면 검정 돌에 이름을 새긴 순교기념비가 나온다.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여순사건으로 죽창에 찔리고, 인민군에게 생매장 당한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무수하게 계속된다. 그리고 선교사묘역으로 이어진다.

우리에게 근대는 무엇인가? 우리 강산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와 친일파를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가? 청산해야 할 과거인가 아니면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잊어야 할 장애인가?

양림동은 말한다.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친일과 매국을 보듬어 안고 가야 할 과거라고 말하지 말라.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우방인가 아니면 또 다른 지배자인가? 양림동은 말한다. 우리가 경험한 미국은 지배자가 아니다. 광주 어머니와 린톤가 후손들은 말한다. 책임이 있다면 당당하게 책임을 묻자!

골목길 순례자는 이런 나라를 걷고 싶다.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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