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장성한 후에

이성훈 목사
굳이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절망과 낙망의 끝은 포기이고 그 삶의 포기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굳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절망적인 상황은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옵니다. 여기에 예외가 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모세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한 애굽 사람이 자기의 형제인 히브리 사람을 쳐 죽이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이 일은 결국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 사람에 의해 탄로가 났고, 이 일이 발단이 되어 모세는 왕궁에서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 40년간 도피생활을 하게 됩니다.(출 2:12)

이 사건은 아마도 모세에게는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한 순간의 실패로 인하여 그 동안 쌓아놓았던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두고 어떤 이들은 모세의 실패로 낙인을 찍어 평가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모세의 섣부른 행동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싶은 것은 단지 모세의 미성숙함에 대한 언급 내지는 그의 실수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1절에 의하면 이 일은 ‘모세가 장성한 후에…’ 생긴 일인데, 여기에서 ‘장성한 후에’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 ‘가달’을 번역한 말입니다. 히브리어의 ‘가달’(‘장성하다’ 출 2:11)이라는 칼(Qal)형태의 동사는 단순히 그가 성장해 있는 ‘성인의 상태’를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모세가 성장한 상태를 알려주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는 동사 형태입니다.

아주 세미하고 미묘한 뉴앙스의 차이가 있기에 조금만 더 부연설명을 하겠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모세가 ‘육체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성장해 있는 상태를 말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모세가 ‘높임’과 ‘존대’를 받을 만큼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잘 성장한 자였음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형태의 동사입니다.

이는 모세가 ‘자기의 형제들을 찾아 그들에게로 간’(출 2:11)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세 자신이 누구에 속한 존재인지 또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정체성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애굽 사람이 노예를 죽이는 일은 빈번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자신이 히브리인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갖지 못했을 때에는 그저 애굽의 노예에게 일어난 소소한 사건 중의 하나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했던 그가 ‘성장’(히.가달)하고 난 후에는 자신의 민족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노예제도가 분명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반복컨대 모세의 살인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도덕적으로 판단여부에 앞서 이제부터 하나님이 바로와 애굽에게 행하실 일을 ‘모세가 성장한 후에’라고 하는 말을 통해 암시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앞으로 애굽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것인가 하는 것과 모세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것인가 하는가를 보여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한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히브리 노예들의 모세에 대한 비우호적인 태도 역시 앞으로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많은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는 수많은 일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당연히 모세의 이 행동은 단순히 한 인간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에서 연유된 실패라기 보다는 앞으로 전개될 출애굽이 결코 평탄치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담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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