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우 목사
그리스 신화에 보면 포세이돈의 아들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 교외에 살았다. 성격이 교활한 그는 집에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는 행인의 신장이 침대보다 크면 큰 만큼 잘라내어 죽였고, 행인의 신장이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게 늘려서 죽였다. 그 어느 누구도 침대에 신장이 딱 맞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에게 잡히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그가 저지른 악행과 똑같은 방법으로 처형을 했다. 이 신화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프로크루스테스의 체계’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개성과 주관이 뚜렷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속에 아집이나 편견이라는 함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이야기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니느웨성에 가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한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아수르 족속들의 멸망을 원한다. 때문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큰 고통을 당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배타적인 선민의식으로부터 나온 편견이다. 또한, 편견은 무지나 불완전한 지식으로부터 나온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하는 말처럼 정확한 사실과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의 자기 경험에 입각하여 제한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의 합리성도 완벽한 합리성이 없으며, 제한된 합리성에 의존하며, 제한된 합리성은 사람이 사는 시대적 제약과 공간적 제약 때문이기도 하다.

시대의 차이에 의해 사람은 과거나 미래의 시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공간적 제약 때문에 동서남북이 각각의 처한 환경적 요인을 서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완전한 이성적 판단과 이해를 방해하고 추측과 상상으로 통해서 사실에서 왜곡된 이해를 만들어서 편견이 되고 만다. 또한 편견은 개인이 가진 트라우마나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미움과 선호 등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나기도 한다.

아버지에게 학대받고 자란 아이들의 경우는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조직의 상사나 연장자에게 특별히 저항하고, 혐오하는 편견을 갖기 쉽다. 남성에게 상처받은 여성이 결혼의 결정을 하지 못하고 남성을 증오하며, 회피하는 현상도 마찬가지 편견에서 나온 행동이다.

아집은 교만과 오만에서 발생할 수 있다. 세상에 자기 보다 더 판단력이 뛰어나고 지식이 높으며 인격이 고매한 분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자그만 지식과 능력이 세상에서 제일 큰 것으로 착각하여 남의 생각을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 가장 옳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가시나무 새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 가운데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이 없고,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어린 지친 새들도 날아와 쉴 곳이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오만과 교만이다.

또한 아집은 우리의 욕망이 지나칠 때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가지는 생각에서 나온다. 우리의 지나친 욕심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거나 이해하기보다는 이기적 생각에서 자기의 영역을 고수하려는 아집으로 변한다.

너와 나의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꼭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 지금 이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개성과 주관이 뚜렷한 시대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편견과 아집이 또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여 문화의 현장에 이 모습 저 모습으로 여름 날 장마에 독버섯처럼 등장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문화는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지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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