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역사가 되는 정동길

서울정동 역사길 순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은 1396년 계비 신덕왕후가 세상을 뜬다. 한양도성 서쪽 취현방 북녘 언덕에 장사하고 능호를 정릉(貞陵)이라 한다. 일본이 중세기에 접어든 조선을 침략한다. 남대문으로 들어 온 가토 기요마사(加?淸正)는 정동 배재학당 앞 은행나무에 말을 묶는다. 가까스로 왜구를 몰아내고 선조는 정동 사가(私家)로 돌아온다. 광해가 어머니를 정동 경운궁에 유폐하고 동생을 증살한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고 정동 경운궁에서 왕위에 오른다. 고종은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국권을 상실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를 이끌고 정동 경교장으로 돌아온다.

정동 골목길 위에 쓴 우리 역사다. 정동 골목길을 걸은 사람들은 모두 역사가 되었다. 역사는 이 골목길을 걸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걸으면 역사가 되는 길, 정동 역사길을 걷는다.

70년의 대역사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서울 지하철 시청역 3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경운궁·서울시의회·경복궁·서울시청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한 가운데에 서울주교좌성당·영국대사관 등 작은 영국이 있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꽤 큰 규모인데도 왠지 모르게 편안하다.

서울주교좌성당을 지은 분은 제3대 트롤로프 주교(Mark N. Trollope, 1862~1930)다. 트롤로프 주교는 한국 성공회가 일본이나 중국 성공회에 편입되지 말고 독립교회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바질교회·성앤드류교회 등 성공회 교회당을 지은 건축가 딕슨(Arthur Dixon, 1856~1929)을 부른다. 1922년 9월 24일 정동 3번지 부지에 정초를 놓는다. 1926년 5월 2일 드디어 서울주교좌성당 공사를 마감한다. ‘덕수궁 스카이라인에 어울리면서도 초대교회의 순수함과 단순함을 지닌 교회당’이다. 

1993년 버밍엄박물관에서 서울주교좌성당 설계도면을 발견한다. 기와지붕·한옥창·대리석·벽돌. 트롤로프 주교는 모든 것이 일본식으로 변해가는 데에 반대하면서 교회건축의 모델이 될 만한 교회당을 짓는다. 제단 뒷면 앱스와 그 위 천정돔 중앙에 있는 예수는 “세상을 밝게 비춘다. 손가락을 들어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고 말한다.

그 아래 성모자 좌우로 순교자 스테파노·복음서가 요한·예언자 이사야·성인 니콜라오 등이 푸른 방석 위에 서있다. 기계로 찍어낸 공산품이 아니라 장인의 땀과 정성으로 빚은 공예품으로 가득한 예배당을 지었다. 조선성도와 영국성도가 힘을 모았다. 1996년 5월 2일 70년 만에 완공한다.

인재를 기르는 집 - 배재학당
서울주교좌성당을 나와서 경운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길로 접어든다. 왼편 언덕 서울시 서소문청사로 들어가서 13층으로 올라간다. 정동전망대다.

중화전과 석조전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경운궁과 높낮이가 서로 달라 마치 주상절리 같은 십자가모양 서울주교좌성당, 도성 북산 북악산과 서산 인왕산, 모두 한 눈에 들어온다. 서소문청사 1층으로 내려와 왼쪽 출구로 나간다. 경운궁 돌담 반대 방향 후미진 길을 오른쪽으로 돌아서 나가면 서울시립미술관이다. 서울미술관을 지나서 좁은 도로를 건너면 배재학당과 마주한다.

아펜젤러는 스물일곱 살이 된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도착한다.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집 한 채를 사서 학교를 세운다. 1886년 6월 8일 이겸라·고영필 이렇게 두 학생을 데리고 첫 학기를 시작한다. 고종은 이 학교에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선물한다. 이듬해 배재학당에서 신학과목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협성신학교로 이어졌고, 다시 감리교신학대학교로 발전했다.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다가 군산앞바다에서 선박 충돌사고가 일어난다. 한 소녀를 구하고 자신은 익사한다. 그는 17년 동안 밤낮없이 조선 팔도 6천리를 걸었다. 배재학당을 세워 독립협회 자도자 대부분을 양성했다.

그가 세례를 베푼 기독교인들은 가장 애국적인 시민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사회적 증거를 통해 조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었다.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 그리고 독립협회는 아펜젤러가 가졌던 신앙의 증거들이다. 시신은 찾지 못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 가묘를 썼다.

언덕 밑 하얀 교회당 - 정동제일교회
1887년 아펜젤러는 스크랜턴 여사 명의로 되어 있는 달성 사택 뒷문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에 있는 작은 초가집을 산다. 벧엘 예배당이라 이름 짓는다. 한양에 첫 하나님의 집이다. 달성 사택은 정동과 진고개 중간쯤 현재 한국은행 후문 근처 상동이다. 여기에서 10월 6일 첫 예배를 드린다.

그 다음 주 최씨 아내에게 세례를 베푼다. 10월 23일 세 번째 주에는 성찬식을 거행한다. 최씨 아내에게 세례를 베푼 이후 입교하는 여성들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11월 근처에 있는 더 큰 집을 사서 벧엘 예배당을 옮긴다. 큰 방 중간을 기준으로 병풍을 쳐서 남녀를 좌우로 나누고 예배를 드린다. 그해 성탄절 첫 조선어 설교를 한다. 이렇게 한양 첫 개신교 교회 정동제일교회를 시작한다. 1897년 12월 26일 성탄주일에 동대문 볼드윈 예배당과 함께 벧엘 예배당도 헌당했다. 지금 우리가 정동에서 보는 바로 그 문화재예배당이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사이 언덕에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왼쪽 언덕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왼쪽 문으로 드나들고, 오른쪽 언덕에서 이화학당 학생들이 오른쪽 문으로 드나들었다. 예배당 중앙에 장막을 쳐서 남녀가 서로 볼 수 없지만연애당이라 불렀단다. 남녀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예배 공간은 1910년대 이후 통합했다.

6.25때 폭격으로 일부 무너지고, 1980년대 화재로 일부 소실되기도 했다. 크고 작은 증축이 있었지만 원래 교회당을 그대로 지켰다.

임시정부 청사 - 경교장
정동길 북쪽 끄트머리로 가면 넓은 도로가 나온다. 도로 건너편에 강북삼성병원이 보인다. 즐비한 병원 건물들 속으로 들어가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오래된 건물이 나온다. 금광으로 큰돈을 번 최창학이 1938년 지은 건물 경교장(京橋莊)이다. 경고장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백범 김구 등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요원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다.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6·25 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로, 전후에는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67년부터는 경교장 뒤편에 들어선 고려병원 원무실로 사용했다. 2005년 백범 집무실을 복원한다. 2010년에는 고려병원 후신 삼성강북병원이 원무실을 이전한다. 2013년 2월 경교장을 개관한다. 정동 골목길에 쓴 역사를 읽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눈을 뜨는데 참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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