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미 국무부 동서문제연구소(East West Center)의 초청을 받아 언론 프로그램인 제퍼슨 펠로우십(Jefferson Fellowship)에 참여한 적이 있다. 각국 언론인 13명이 미국 주요도시를 순회하면서 전문가들과 하루에 7~8시간씩 세미나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일과를 끝내고나서 매일 밤늦게까지 다음날 세미나 주제와 관련된 영어단어 공부를 해놓지 않으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힘이 들었다.

6주간의 프로그램을 마치고 한국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면서 기내에 비치된 한국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약 3시간이 걸렸다. 오랜만에 한국 신문을 정독하고 난 첫 느낌은 이런 것이었다. “아, 정글로 다시 돌아왔구나!”

한국 신문을 장악하고 있는 내용은 진보와 보수의 싸움, 음모, 갈등 등 온통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 6주간 호흡했던 미국언론이나 미국사회는 이렇게까지 어둡지는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바꾸지 못하면 한국에 밝은 미래가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몰려오기까지 했다. 그렇게 비방하고 싸우는 분위기는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나아진 것은 거의 없는듯하다.

한국사회의 화합은 너무 어려운 주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분열은 점점 더 가속화되어 간다. 해마다 발표되는 사회통합지수를 보면 한국의 사회포용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우리 사회의 갈등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발생하는 비용이 연간 최대 246조원에 이른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27%를 갈등 해소 비용으로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중화(中華)’와 ‘굴기(?起)’라는 국가 주도적 문화코드로 인해 주변국에 화(禍)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거대한 나라 중국과 원자폭탄의 침략을 받고서도 힘 앞에서는 모든 가치를 뒤로 하고 원폭한 나라를 ‘은인’이라고 칭송하는 일본을 곁에 둔 나라다. 또 사고방식과 행동양태가 세계의 보편적인 규범과는 상당히 달라져서 무엇을 어떻게 합의해야 할지 분간하기가 어려운 북한을 같은 민족의 차에 태워 데리고 가야 하는 현실에 놓여있다.

이런 기사를 보자. “김 대통령은 최근 일련의 사건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완화시키기 위해 이번 주에 전면 개각을 단행할 것이라고 청와대 고위관리가 어제 말했다. 그 청와대 관리는 개각의 폭에 대해서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청와대 소식통은 김 대통령이 ‘선거관리내각’을 구성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대통령이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의 초당적인 관리를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인사를 일부 발탁할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이 문장은 오래전 한 신문기사에서 발췌한 것이다. 내용상 특별한 것은 없지만 오늘날의 정치기사와 비교해보면 색다른 두 가지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정부 내에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해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대통령이 개각을 한다는 것(유연성)이고, 또 하나는 개각을 한다면 선거관리내각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다가오는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의 초당적 관리를 위해 중립적 인사를 발탁한다는 점(중도성)이다.

과거에는 한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이런 중후함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대째 대통령들에게서는 이런 면을 찾아보기 어렵다. 국정의 난맥을 양보로써 돌파하는 중후함 대신에 오기가 들어찬 것 같다. 야당도 문제다. 현재의 야당인사 중 정치현안에 대해 독설 대신 정치력을 발휘할 인사가 있는지 의문이다.

지난해 교회에서 유기성 목사의 저서 ‘예수님의 사람’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본문 중에 “선교사들의 평가에 의하면 일본과 중국과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영이 서로 다른 것을 느끼는데, 일본은 음란의 영, 중국은 탐욕의 영, 한국의 분열의 영이라고 한다”는 대목을 읽고 놀란 적이 있다.

한국에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져 성장동력을 키우기가 어렵다는 것과 계층간 너무 싸운다는 난제를 안고 있다. 분열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정치인들이 국민의 존경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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