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나의 보배야, 만약 네가 살아남으면 꼭 기억해다오. 내가 널 사랑했다고.” 2008년 5월의 중국 대지진에서 구조대원들은 아기를 포대기로 싸안은 채 죽은 한 젊은 엄마의 시신을 거두었다. 엄마 품의 아기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 포대기 안에서 휴대전화기 하나를 찾았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자신의 생명이 소진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남긴 문자 메시지 한 줄이 떠 있었다.

▨… 그 대지진에서 또 한 명의 젊은 엄마는 윗옷을 벗어 흙이 흘러내려 덮치지 않도록 가리우고 고개를 숙인 채 태어난 지 100일이나 되었을까 하는 아이를 안은 모습으로 숨져 있었다. 구조당시 아기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 현장의 중국인 의사는, 이 젖먹이의 엄마는 자신이 죽더라도 얼마 동안은 아기가 젖을 먹고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고 증언했다.

▨…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바라보면서 남기는 문자 메시지 한 줄, 자신이 숨을 거둔 후라 하더라도 조금은 더 숨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젖을 물리며 가린 윗옷 하나에 담긴 메시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기와 부모의 관계를 생물학적 관계로만 파악하는 현대인들은 젊은 엄마의 문자 메시지 한 줄, 엎드려 젖을 물리며 덮치는 흙을 막으려는 젊은 엄마의 몸이 말하는 메시지 따위에는 아예 고개를 돌리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 아닐까.

▨… 훗날, 엄마의 품이 방패막이가 되어 살아난 두 아기는 엄마의 품을, 엄마가 기억해달라고 부탁한 그 사랑을 마음 속에 담아두기라도 할까. 인문학자 김우창은 “우리의 참으로 슬픈 앎은 인간의 세계에서의 부모와 우리 자신의 위치가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 때 시작한다”(‘깊은 마음의 생태학’)고 지적해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참으로 슬픈 앎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까지도 이기적 유전자의 내재적 이기성의 결과로만 파악하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 가정은 유전자의 자기복제 행위로 이뤄지는 것일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가정에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이 있고 자기희생이 있다. 옛사람도 “부모의 깊은 은혜를 갚으려면 하늘과 같이 끝이 없네”(시경)이라고 하였다. 이 가정이 이 시대에 이르러 해체되고 있다. 해체당하고 있다. 교회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우리 성결교회는 무엇보다 이 가정 해체사태에 정면으로 맞서는 방책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의 선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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