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 , 바로 내 인생은 내 두 딸에게 달려 있소. 그애들이 행복하다면(중략) 내가 무슨 옷을 입건 내가 누운 곳이 어디이건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애들이 따뜻하면 나는 춥지 않소. 그애들이 웃으면 나는 결코 슬프지 않소. 나는 이정도로 딸자식들을 생각하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나는 딸들을 더 사랑하고 있소.”(오노레 드 발자크·박영근, ‘고리오 영감’)

▨… 고리오 영감의 억지 같은 외침에 귀 기울이게 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속물인 딸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고리오 영감에게서 아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살아나기 때문일까. 아마도 우리교단의 은퇴목사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나는 딸들을 더 사랑하고 있소.”라는 절규를 애써라도 외면하려 할 것이다. 아닌가, 정말 아닐까.

▨… 없을 것이다.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리교단의 목사들은 목사가 되기 위한 그 모든 교육과정에서 부모보다, 자식보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교회를 더 사랑하도록 교육받고 그 가르침에 따라 서약한다. 그 서약을 지키기 위해 저들은 가난의 짐을 처자식에게 지우면서, 남편으로서 아비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없다는 서러움 때문에 안으로, 안으로 눈물을 삼킨다.

▨… 안으로 눈물을 삼켜 조개는 진주를 낳는다고 한다. 안으로, 안으로 눈물을 삼킨 목사들은 과연 무엇을 낳을까. 천국이 가난한 자의 것(마5:3, 눅6:20)이라는 선언을 금과옥조로 붙드는 믿음을 낳는 것일까. 가난은 물질주의의 온갖 더러운 덫에서 벗어나는 현실적 처방이라고 자위하면서도 가난한 목사들은 묻는다. 왜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심령이란 말을 빠트려 우리를 이토록 곤혹스럽고 힘들게 하느냐고.

▨… 히브리 대학의 철학교수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가족이 있는 사람의 가난은 결코 고상한 것일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을 모욕하는 조건이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우리교단의 대부분의 은퇴목사들은 평생 가난을 훈장처럼 달고 감내해왔다. 저들이 고리오 영감의 회한을 곱씹는 자리에만 머무른다면 뉘라서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 증언할 수 있겠는가. 교단 역사에서 처음 마련된 총회와 서울신대 총동문회 공동주최의 은퇴찬하회가 성결인 모두의 축하와 감사를 담아 평생 한 번도 찬하를 받아본 적이 없는 가난한 은퇴목사들이 환하게 웃는 찬하회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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