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필의 헌신과 신학생시절

오영필은 신자들에게 간증한 내용을 실천하려는 듯 그 때부터 주일에는 서둘러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 교회에 갔다. 그는 교회에서 한바탕 큰 소리로 기도를 한 후, 아내와 함께 강대상으로부터 교회 마루를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았다. 그의 아내는 4살이나 위인 연상의 여인이었지만 남편을 하늘처럼 받드는 현모양처여서 그의 삶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때는 교회에 사찰도 없고 시골교회라 여전도사도 없어서 그는 사찰 노릇도 스스로 했다. 또 예배드리러 오는 신자들을 교회 입구에서 다정하게 인사로 맞고,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신발을 신발장에 가지런히 정돈하는 등 열심히 봉사했다. 그리고 예배 후에는 목사님과 함께 문 밖에 서서 신자들에게 인사한 후 아내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 식구들의 점심상을 챙기도록 했다. 예수를 믿을수록 효도는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를 다시 청소한 후에 점심을 굶고 기도하면서 배가 고프면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를 생각하고 참았다. 나중에 가난한 교역자가 되어 굶을지도 모르는 연습을 미리 해두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는 어린이들에게 가르칠 성경을 읽고, 재미있게 가르칠 구상을 했다. 오후 2시에 모이는 주일학교에서 그가 흥미 있게 설교하자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하면서 소문이 났는지 금방 자리가 없을 정도로 주일학교가 부흥되었다. 그는 이것이 앞으로 교역자가 되어 할 일을 미리 실습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 해 연말에 교회를 순회하는 감리목사가 부강교회에 왔다. 그 때 부강교회의 목사가 오영필의 헌신생활을 얘기하며 감리목사에게 신학생 후보로 추천했다. 감리목사가 오영필을 만나 은혜의 체험 사실을 물은 후, 내년에 경성성서학원에 들어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오영필은 1932년 봄에 서울로 올라가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5층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을 본 그는 일본 나고야에서는 못 본 5층 건물에 먼저 마음에 들었다. “이 높은 건물에서 열심히 배워, 이 건물처럼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했다.

당시는 교역자가 드문 때여서, 학교 수업은 1년에 3개월만 하고, 나머지 9개월은 목회실습기간으로 했다. 그래서 그는 실습기간에 교단본부의 파송을 받아 마산 오동동교회, 부산 수정동교회, 진주교회 등 주로 경상도지역에서 목사님들의 지도를 받아 열심히 훈련했다.

신학생들은 3개월 공부한 것을 가지고 9개월을 가르쳐야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는 한자라도 더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교수들의 가르침을 노트에 일일이 기록했다가 그것을 써 먹었다. 특히 그는 이명직 교수의 성서강해에 매혹되었다. 처음에는 성경의 많은 진리 중에 유독 사중복음만을 강조하는 데 저항을 느꼈지만, 이명직 목사님이 성경 66권을 사중복음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강의에 큰 감동을 느꼈다. 사중복음이 단순한 교리이기 전에 성서전체를 여는 열쇠요 요체라고 생각하니, 그의 성경이해가 빠르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때부터 이명직 목사의 강해와 설교를 깊이 연구하면서, 자신의 설교 체제를 이명직 식의 성서중심의 강해와 사중복음을 열쇠(key)로 하는 방향으로 잡아나갔다. 그의 유일한 설교집 ‘꿈에 본 포도나무’(1962)와 그의 강해집 ‘창세기’, ‘다니엘서’, ‘아가서’, ‘전도서’ 등을 보면 알 수가 있고, 그의 부흥사경회 교안인 ‘사중복음’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명직 목사의 스타일임을 알게 된다. 그는 평생토록 이명직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며, 따라서 오영필을 이명직의 성서적인 아들, 또는 후계자라고 부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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