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 교단해산과 성결교회의 변화

주승민 교수
두 가지 질문이 이 연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3.1운동의 근대사회적 가치인 민주, 평등, 박애 정신과 무저항적 저항운동이 성결교회 해산사건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 역사적 교훈이 잘 살아났는가 하는 질문과,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 해산 사건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결론에 이르렀는가 하는 질문이다.

사실 일제하에서 1910년 8월 29일이 강제한일합병으로 국치일이었다면 한국교회사에서 성결교회가 해산된 1943년 12월 29일은 ‘교회의 치욕스런 날’, 교치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 대한 질문이 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살펴본 결론은 1919년의 민족자결주의를 근간으로 한 평화 운동이 역사적 파급효과를 크게 이루지 못한 것처럼 성결교회의 1943년 해산 사건도 순교영성의 결실도 크게 부각되지 못했고 조금 더 강력하고 스마트한 지혜의 발동으로 일제의 학정을 대응치 못했다는 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그 내용이 일본 열도 안에서 있었던 일본성결교단의 대응과 전후 사태 수습 등으로 견주어볼 때 한국교회 내에서는 여전히 미흡한 모습이 비교되고 있음을 정리했다.

일본에서는 일본기독교단이라는 일원화된 교단 통폐합을 진행한 기간이 무려 40년이나 결렸다.(일본통합에서는 소위 ‘성결교회’와 같은 군소 교단의 적극 반대로 도미타 통리사가 ‘부제’라는 명목으로 일본정부 당국과 협의 과정을 충분히 보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943년 12월 29일 일본의 강압으로 성결교회가 희생의 결정적 당사자가 되는 ‘교단해산’을 맞으면서 매우 단기간에 파시즘의 정책이 성공하게 된다. 이 해산 사건 이듬해 1944년 4월 5일 한국의 강제 병합의 터전이 된 조선 총독부의 공식적 문서에 보면 해산된 189개 교회의 명단이 수록된 비극적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연구는 일본에서 성결교회 해산 과정과 한국에서의 해산 과정이 자연 비교되어 나타난다. 일본교회의 희생(순교자들이 토루 목사를 비롯해 등장함)이 극명하며 일본에서는 연합된 ‘일본기독교단’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성결교회를 해산하는 일본 파시즘의 간접적 박해라면 한국성결교회에서는 일본정부의 공권력이 직접 관여했고 성결교단의 당시 지도자 7명의 공동 서명으로 해산이 확정된다. 이러한 ‘교회의 비극의 날’, ‘교치일’의 상황을 겪으면서 과거를 살아온 가시밭의 백합화 같은 교단으로 과거를 거울삼아야 한다는 점을 피력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와 성결교회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분명한 배움을 얻어야 한다. 3.1 운동 정신과 그 이후 존 토마스 선교사의 ‘구타사건,’ 그리고 강경성결교회에서 점화된 백신영 전도사, 김복희 집사를 주축으로 일어났던 ‘최초 신사참배 거부 선도 운동’이 보여준 정신을 잘 이어받지 못한 무기력함에 분명한 자정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에 충실한 열매를 맺어야 하며 타교단과의 온전한 화해를 꿈꿔야한다. 이를 통해 모든 한국교회의 총체적 회개를 주도해서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맛보는 일에 견인차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물론 개교회 중심적인 현대적 상황에서 살필 때 ‘성결교단 해산’은 타교단에서 볼 때 남의 일같은 사건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상세한 해산 과정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할 때 타교단의 인물들이 그렇게 대규모로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그 이음매가 발견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성을 우리가 염두에 둘 때 자매 교단의 아픔은 바로 나의 아픔이 아닌가?

그러한 연대성을 감안할 때 그 비참한 무기력, ‘성결교회 해산’을 막지 못한 책임의식도 동시에 나누어 함께 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타자를 위한 공동체’로서 교회의 본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피아’의 구별없이 앞장서서 과거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모두가 함께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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