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거부는 순수한 믿음운동

박영범 목사
3.1운동이 어느덧 100년을 맞았다. 일제의 폭압에 맞선 한민족의 정신이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다. 기독교 역시 일제에 맞서 3.1운동을 이끌었지만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성서적 전통을 세상에 항상 올바르게 드러냈던 것만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사참배의 역사이다.

신사참배는 일본의 고유한 민간종교인 신도(神道)의 사원, 즉 신사(神社)에 참배하라는 일본의 정책을 지칭하는 말이다. 신도(가미 노 미치)는 ‘고대 일본의 신(가미)을 따르는 길’이다. 일본인들은 신성한 존재, 신적이고 영적인 존재를 숭배하였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자연숭배적이며 다신론적 형태를 지닌다.

또 신사참배는 일본의 국체인 천황제를 지배체제로서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 종교를 수단으로 삼았던 일제의 교활한 통치도구였다. 특히 1915년에는 “신사사원규칙”(부령 82호)과 “포교규칙”(83호)을 반포함으로써 한국에 신사참배를 강요할 수 있는 근거들을 마련하였다. 이후 1936년 미나미 총독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신사참배가 한국인에게 강요되었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1937년 8월1일에 장로교 일각에서는 ‘시국설교 및 기도회’를 승동교회에서 개최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을 깨우치고, 일제를 위한 아침기도를 결의하였다. 급기야 1938년 12월 12일에는 이명직, 양주삼(감리교), 홍택기(장로교) 목사 등이 전국 기독교를 대표해 일본의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에 참배하게 된다. 

활천 또한 이런 일제의 정책을 수용하여 따랐으며, 성결교회 지도자들의 친일적 글이 실리게 되었다. 물론 성결교회를 지키고 또한 복음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한 타협이라 할지라도, 이는 교단의 아픈 역사로 분명히 남아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에 교단이 굴복하자 성결교인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의 혼란기와 시련기에도 성결교회에는 자랑스러운 신앙의 유산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우상숭배를 거부한 신앙의 전통과 재림사상을 확고한 믿음으로 간직했던 자랑스러운 유산이었다. 먼저 적극적인 저항으로서는 강경교회, 박봉진 목사의 순교, 한정우·박윤상 집사의 불경죄 사건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강경교회의 신사참배거부 운동(1924)은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로 믿음을 지킨 대표적인 사례이며,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을 10년 정도 후퇴시켰다. 또한 박봉진 목사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는 믿음을 고수했으며, 재림하실 주님이 우상인 천황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강한 재림신앙을 남겨주었다.

여기에다 논란의 중심이 되곤 하는 이명직 목사의 예를 소극적 저항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의 친일사상이 활천이나 그의 행적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러나 교단을 살리려는 관점으로 이를 해석하는 것이다. 「활천」의 폐간, 학교의 폐쇄, 그리고 교단이 해산되기까지 성결교회의 믿음을 지키려는 교단 역사의 큰 흐름 안에서 이명직 목사의 행적을 보려는 시도이다.

성결교회의 신사참배 거부는 순수한 믿음의 운동이었다. 우상숭배를 금지한 십계명에 대한 축자적 믿음, 재림예수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고수함으로써 신사참배를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명직 목사의 행적은 우리의 신학적 성찰이 부족했음을 시인하도록 만든다. 신사참배와 재림사상의 신학적 부조화가 그 예이다.

또한 우리는 일제가 권력의 지배구조를 확고히 다지기 위한 국체로서의 천황제,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신사참배라는 도구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국가에 대한 완전한 충성도를 구축하려는 일제의 종교적 시도와 교묘한 자기 권력화를 신학으로 반박하고 비판하지 못했다.

우리는 역사가 던져주는 모호함과 교활함에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과 순수한 믿음의 역사를 계속 이어나가야만 한다. 여기에 성결교회의 밝은 미래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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