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두 목사
2019년 3.1절 100주년 아침에 기미독립선언서를 다시 읽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집필하고 한용운이 공약 삼장을 덧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원이 아니라 선언의 형식을 택한 것은 자주의 정신을 강조하기 위한 최린의 의견이었다고 합니다. 그저 소리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명문이자 격문입니다. 선언서 속 ‘오등(吾等)’은 비폭력 혁명가들이자 역사를 읽는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새 시대를 꿈꾸며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비전은 이것입니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展開)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時代)가 거(去)하고 도의(道義)의 시대(時代)가 래(來)하도다.”

그런데 이 감동적인 구절을 읽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위력의 시대는 패도(覇道)입니다. 도의의 시대는 왕도(王道)입니다. 패도는 힘에 의존합니다. 왕도는 덕과 예를 근간으로 합니다. 패도가 철저히 권력지향적이라면 왕도는 천(天)과 성(性)의 도덕률에 근거합니다.

조선조 중기 이후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언제나 왕도를 명분(대의)으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하게 패도를 지향했습니다. 유난스런 당파싸움이 그 때문이고 그 결과 나라가 망했습니다. 왕도와 패도의 이분법적 구별은 이데올로기이자 그들의 허위의식입니다.

조선의 역사와 정신은 이미 짓밟혔습니다. 일제의 강권과 위력은 당시 조선을 넘어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동양의 평화는 깨어졌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도의의 정치는 유례가 없었습니다. 권력은 패거리에서 나오고 정치는 힘이 곧 정의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시대정신이라고 믿었던 민족자결원칙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과 발칸 중심의 세력을 재편하기 위한 제한적 원칙이었을 뿐입니다. 그 원칙조차 제국주의적 강대국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응도 무자비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상당수가 오래 지나지 않아 변절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현실인식은 전혀 과학적이지도 치열하지도 않았습니다.

같은 날 하노이 미북정상회담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화면에 가득 채워졌습니다. 무심히 화면을 응시하던 중 또 한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트럼프와 헤어지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는 김정은의 모습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이 다방면으로 그 이유를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정은은 지금 이 사태가 객관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내 눈에 그는 30대 중반의 독재자이지만 자신(북조선)이 당면한 딜레마에서 현실적 해법을 찾기에는 아직 내공이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비만은 어쩌면 그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김정은에 비해 트럼프는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건 할 수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트럼프가 싱가폴 제1차 정상회담 전부터 하노이 회담 전후까지 김정은에 대해 발언한 내용들을 일견해보십시오. 언제나 자신이 ‘갑’이고 김정은은 ‘을’입니다. 애초에 미국과 북한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근대 이후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가 대한민국과 북한을 단 한 번도 대등하게 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패배주의가 아니라 이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등소평의 도광양회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핵무기는 질과 양의 측면에서 더 강력하게 진화되었습니다. 핵무기 보유국도 늘었습니다. 하지만 핵무기는 본질상 공격용 무기가 아닙니다. 방어용이자 협박용인 게지요. 제2차 세계대전 후 핵무기가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증거입니다.

핵무기의 사용은 공멸입니다. 그것을 막는 최소한의 시스템은 국가 이성입니다. 박정희의 핵무기 프로젝트는 고육지책이었습니다. 북한 핵무기에 대한 진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