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필의 중생 체험과 소명

오영필은 청풍명월의 충청도 양반기질을 전형적으로 타고 났지만 이미 일본 유학생활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젊음이 한창일 때에 한가한 농촌구석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또한 해마다 몇 차례나 찾아오는 조상들의 제사에 장손으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쓸데없는 허례허식 같았다. 제사는 하나님께 드려야하는데 유교가 이것을 모르고 조상에게 막대한 재물을 제사비용으로 낭비함으로 힘을 잃고 일본 사람들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니, 이제라도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모두 예수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일마다 교회에 열심히 가면서 아내를 데리고 갔다. 주일이면 오전에 동네 친구들에게 놀러 간 할아버지가 점심때에 집으로 와보니 손자며느리가 보이지 않고 안방에 차려 놓은 밥상만 보였다. 할아버지는 배가 고파 할 수 없이 손자며느리가 차려 놓은 식은 밥을 먹으면서, 손자 내외를 따끔하게 버릇을 고쳐 놓겠다고 결심했다.

그 날 오후에 교회에서 돌아 온 손자 내외를 앞에 앉혀 놓고 할아버지가 훈계했다. “이놈아, 내가 너를 가르칠 때 분명히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고 가르쳤는데, 예수가 좋으면 너 혼자 갈 것이지 왜 아내까지 데리고 가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그 때 그에게 지혜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저는 그 교훈과 함께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삼종지도(三從之道)도 배웠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을 따라가야지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손자의 명민함과 담대함에 그만 놀라면서, 앞으로 손자 놈을 말로는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가는 것이 답답한 시골생활에서 해방되는 탈출구였기에 아내와 함께 열심히 다녔다. 그의 나이 25세(1929년)에 아내와 함께 예수님을 구주라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듬해 1월의 농한기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다. 강사 장원초 목사가 인간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신자들에게 “회개하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그는 깜짝 놀랐다. 마치 죄를 짓다 들킨 것처럼 그는 놀라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는 충청도 골수 양반으로 죄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성령이 역사하니까 그동안 숨어 있던 죄들이 모두 생각나서 며칠 동안 울면서 회개했다. 부끄러웠지만 그렇게 회개하고 나니까 마음이 시원하고 평안해졌으며 기쁨이 마음 속에서 용솟음쳤다. 그래서 찬송 중에 그는 벌떡 일어나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찬양했다. 모두들 놀라면서 함께 기뻐했다.

이때부터 그의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며 갑자기 농사일이 싫어졌다. 그대신 날마다 교회에 가서 성경을 읽고, 설교말씀을 들으며 기도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농사일을 그만 둘 수 없어 일을 하면서도 쉬는 중간에 교회에서 산 성경을 읽었고, 찬송도 불렀다. 그리고 수시로 기도했다.

하루는 밭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기도하고 싶어서 기도하려고 머리를 숙였을 때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밭에 곡식이 누렇게 익었는데, 추수할 일꾼이 없구나.” 그래서 그가 눈을 떠서 들판을 바라보았다. 아직 추수 때가 아니어서 들판이 푸르렀다. 그는 다시 기도하려고 고개를 숙이자,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아, 주님의 말씀이다. 영적인 밭에 추수할 일꾼을 부르시는구나.” 그는 “주여, 나를 추수 일꾼으로 써 주세요”하고 헌신기도를 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교회에 가서 간증하며,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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