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영 목사
묵도는 1912년 9월 8일 “묵도와 학생 이라는 일본 신문기사”에서 처음 나타난다. 일본은 메이지 일왕 기일 저녁에 교통기관을 멈추고 3분간 참배를 한 것이 기사화 된 것이다. 1914년 일왕의 왕후 기일 때부터 묵도는 국민의례가 된다.

이후 묵도는 일본 토착종교인 신도의 가미를 섬기는 종교 의식으로 고착화된다. 신도의 종교의식은 신사에서 행하는 신사참배, 일본 황실을 향해 허리 굽혀 숭배하는 궁성요배와 동방요배, 전몰용사에 대해 고개 숙여 참배하는 ‘묵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묵도는 일본에서 국민의례이자 종교의식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1919년 3.1만세 운동 이후로 조선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을 잠재우고 일본의 침략전쟁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내선일체, 일시동인을 강조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에 이르러서는 일장기 게양, 궁성요배, 신사참배, 정오묵도 등을 통해 황국신민화를 더욱 강요했다.

그중 정오묵도는 낮 12시에 사이렌이 울리면 고개 숙여 기도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 가미다나라는 소형 신단을 만들어 모시도록 했고, 학생들은 1주일에 한 번씩 신사를 참배하도록 했다. 당연히 각종 행사에도 묵도는 빠지지 않았다. 극장 공연, 환갑잔치, 결혼식장, 친목 모임 등에서도 기미가요(君が代) 열창과 궁성요배를 강요하였다. 환갑잔치 마당에 내걸린 식순에 보면 ‘궁성요배’ 다음에 ‘묵도’가 들어있다.

묵도가 예배에서 꼭 신사참배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1925년(대정 14년)에 발행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식에 수록된 예배순서(성만찬 포함)를 보면 ‘묵도’로 예배를 시작한다.

그러나 1938년 2월 조선총독부는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지정해놓고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며, 예배당에 국기를 게양해 놓고, 예배 전에 국기에 경례를 하고, 황궁을 향해 절하는 ‘황궁요배’를 하고, 국가(기미가요)를 부른 후에,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고 ‘묵도’하게 했다.

1939년 10월 8일 경성성서학원 대강당에서 일제의 어용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 성결교회연맹’ 결성식의 식순은 궁성요배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규약, 선언, 묵도(황군장병을 위한), 일본인 내빈축사가 있었다. 규약의 내용은 내선일체, 전도보국을 달성하기 위해 강연회 등을 개최한다고 되어 있으며, 이명직 목사를 이사장으로 선출하였다(간추린 한국성결교회사, 기성출판부, 137-138). 이 시대 교회는 한 달에 한 번 씩 ‘애국예배’ 때 거둔 ‘애국헌금’을 일본의 전쟁비용으로 납부했다.

묵도를 ‘묵상기도’의 줄임말 정도로 이해하면 오산이다. 묵도는 일본 종교의식에 뿌리가 있는 것이다. 일제의 지배수단으로 고안된 국민의례의 식순이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유산으로 왜곡된 예배순서가 오늘날 정형화된 것이다. 언제까지 묵도할 것인가? 묵도를 묵상이나 조용한 기도로 바꾸어서 하는 것도 마땅치 않다.

초대교회는 말씀을 낭독한 후 짧은 기도를 드리는 예배기원으로 시작했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 어느 누구도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거나 가르친 것이 없다. 한국 선교 초기 예배순서에 묵도는 없었다.

오늘날 우리교단,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우리나라 대표적인 개신교 교단의 예배와 예식서 안에서 묵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회현장에서 묵도는 아직도 맹활약중이다. 이제 컴퓨터 안에서 선배들의 근거 없는 유산이 되어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 컴퓨터에서 묵도를 제하여 주옵소서. 기도라도 해야 할 판이다.  

동적인 한국교회의 예배 안에 정적인 요소는 필요하다. 지은 바 죄에 대하여,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침묵 가운데 자신을 살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묵도는 아니다. 침묵은 사죄의 기도와 용서의 선언과 관련하여 기도하는 것이 좋다. 어색하고 불편하겠지만 그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제 더 이상 “다같이 묵도하심으로 예배드리겠습니다”라고 하지 말자. “다같이 기도하심으로 예배드리겠습니다”라고 고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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