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호 교수
한국인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표현을 습관적으로 사용하지만, 북반구에 속한 대한민국은 ‘겨울, 봄, 여름, 가을’ 순서로 시간이 흐른다.

각 계절의 이름은 순수 우리말로부터 유래했다고 전해지는데, 겨울은 ‘겻다’(머물다, 멈추다)라는 동사에서, 봄은 ‘보다’에서, 여름은 ‘열리다’ 또는 ‘열다’에서, 그리고 가을은 (곡식을) ‘끊다’라는 말의 남도 방언인 ‘갓다’로부터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니 4계절을 이어서 풀이하면, 먼저 머무르거나 멈춰야 보고 열 수 있으며 그 다음에 최종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구나 예측 가능한 쉽고 단순한 명칭들이지만, 농경사회의 환경에 깊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던 조상님들의 해학이 느껴진다.

차가운 기온 탓에 칩거했던 신년 첫 달의 기억이 ‘머물다’ 또는 ‘멈추다’라는 단어로부터 ‘겨울’을 유추한 근거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급히 일을 진행하지 말고, 충분히 사색하며 전체 구도를 침착하게 조망하라는 의도가 담겼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은 고민할 필요 없는 익숙함을 주지만, 익숙함이 제공하는 편안함에 속아 일을 경솔하게 처리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조용히 멈추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미래의 방향과 목표를 깊이 성찰하는 겨울이 없다면, 신속하게 전진하는 봄과 여름, 그리고 풍요로운 가을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음을 체득한 경험의 발로인 셈이다.

논리의 비약일 수도 있으나, ‘겨울’과 비슷하게 생긴 ‘거울’도 유사한 어감을 준다. ‘거울’은 ‘거꾸로’의 옛말인 ‘거구루’에서 ㄱ(기역)이 탈락하고 동음이 생략되어, ‘거구루 → 거우루 → 거울’이 됐다는 설이 있다. 거울 속 모습이 좌우 반대로 비친다는 점에 착안한 풀이인 동시에, 자신의 실상을 타자의 관점으로 볼 줄 아는 자세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대부분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본인이라고 자부하지만, 정작 자아의 본모습이나 정체성은 타인의 평가가 더 정확할 수 있음을 항상 유념하라는 의미라고 하겠다.

거울의 용도가 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임을 생각할 때, 나의 기준에 대한 확신만큼 다양한 시선들의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의 강조라는 해석도 왠지 그럴듯하다.

겨울과 거울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진지하고 올바른 성찰, 이젠 진부하게 들릴 수 있는 시각의 다양성 또는 3인칭 시점에 관한 논의를 재론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젠 새롭지도 않지만, 새해 벽두부터 성범죄와 목사 안수 위조, 차명계좌와 공금 횡령 등을 화두로 한국교회의 비참한 현주소와 그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교회지도자들의 민낯이 여과없이 보도되는 까닭이다. 비신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한 죄질 자체도 기가 막히고, 불법을 인지했음에도 일말의 죄의식은커녕 오히려 짜증을 부리거나 죄를 덮기 위해 거짓을 일삼는 장면은 실망을 넘어 절망의 바닥을 실감케 한다.

새해를 맞아 부흥회나 수련회 또는 기도회가 여기저기서 이어지고, 회개와 십자가 외침이 가득하건만… 회개와 십자가는 단지 감성적인 기승전결을 위한 종교적 레퍼토리일 뿐, 그 용어들에 대한 무지의 소치는 고스란히 참담한 결과로 나타난다. 

죄와 구원을 마귀나 사탄과 연계시킨 알레고리 해석을 핑계로, 공동체와 괴리된 교만과 이기주의를 합리화하지 말자. 억지로 꾸며낸 멋들어진 논리적 개념에 도취되어,  진짜 영성과 복음을 외면하지 말자. 이백년 가까운 선교역사가 무색하게 겉멋만 번지르르한 꼴불견 신앙에 빠지지 말자. 제발 믿음에 대해 잘난 척, 진리에 관해 아는 척 하지 말자. 그저 겨울처럼 겸손히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며, 춘풍추상(春風秋霜)의 자세로 주님을 따르자. 그래야 보고(봄) 열리고 (여름) 거둘 수 있다(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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