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더딤을 보고

이성훈 목사
오래 전 어렵지는 않아도 그리 넉넉하게 산다고는 할 수 없는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은 목회자를 극진히 섬기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어느 날 부터인가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매 시간 설교 강대상에 물을 떠 놓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잔도 따로 준비하고 온갖 종류의 차를 정성스럽게 끓여서 지극정성으로 이 일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그 가정이 경제적으로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그 “권사님 강대상에 물 떠다 놓더니만 축복 받았네”하는 말이 교회에서 돌기 시작했고 다른 분이 그 일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문득 ‘흥부와 놀부’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흥부가 어느 날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불쌍히 여겨 정성껏 고쳐주었습니다. 얼마 후 그 제비는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었고, 다 자라난 박 안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담겨져 있어서 흥부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것을 전해 들은 놀부는 샘이 났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제비 다리를 부러뜨린 후 고쳐 주고 그 댓가로 받은 박씨로 인해서 놀부가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놀부가 벌을 받은 이유는 흥부가 가진 아름다운 마음을 보지 못한 채 제비 다리만 고쳐 주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착각을 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본지 겨우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시자 모세는 계시를 받기 위하여 산에 올라가게 되었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출 32:1)자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계획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출애굽기 32장 1절을 보면 그들은 모세가 ‘더딤을 보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더딤’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의 ‘보쉐쉬’를 번역한 말입니다. 우리 국어 성경에는 ‘더딤’이라고 번역했지만, ‘보쉐쉬’의 일차적 의미는 ‘부끄럽다’, ‘수치스럽다’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소위 히브리어의 ‘폴렐’ 형태가 되어 그 뜻이 ‘지체하다’, ‘연기하다’로 된 것입니다. 비록 그 뜻이 변형이 되었다고 해도 이 말에는 히브리어 ‘보쉐쉬’의 본래 의미가 분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내려오기에 당혹해 하는 광경이 펼쳐졌는데, 이는 그들이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에 지도자인 모세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광야에서 그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모세의 지팡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출 24:17)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바로를 상대로 그 큰 승리를 거두고 척박한 광야에서 그들이 먹고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었던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 때문이었지, ‘모세와 모세의 지팡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보다는 오직 오직 복 받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오직 내 욕심만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오직 믿음’(히 11:6)입니다. 2019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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