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필(吳永必)의 성장과 법관의 꿈

오영필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치욕의 해 1905년 1월 11일에 충북 청원군 현도면 매봉리 보성 오 씨 문중에 문호(文鎬)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완고한 유교전통에 따라 5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2년 후 서당에 들어가 5년 동안 소학까지 공부했다. 그러다가 13살 때 동화소학교에 입학하며 신학문을 공부하였고 1년 후 할아버지 성화에 못이겨 옥천에 사는 18살 김영례 씨와 결혼했다.

그는 가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을 넘어가는 보름달을 보면서 서툰 한시 가락을 읊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기질은 19살이 되던 해에 숙부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함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평북 강계에서 살던 숙부(오인호)가 예수를 영접한 후, 고향 친척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돌아와 맨 처음으로 가문의 장조카인 그를 전도했다. 한학에 능통한 숙부한테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 아들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공자와 맹자가 가장 큰 스승인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주일에 숙부를 따라 20리 길 되는 부강교회에 갔다. 그런데 누구보다 할아버지가 숙부에게 노발대발 하셨다. 믿으려면 혼자 믿을 것이지 가문의 제사를 받들 장손을 버려놓았다는 것이다. 그 때 숙부는 “아버지,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보니, 공자나 맹자 말씀은 어린애 같어유. 아버지도 믿어보시면 알어유.”하고 담대하게 말했다. 전에 할아버지 말이면 대꾸 없이 “예, 예.”하던 숙부였는데, 달라졌다. 그것이 영필에게는 신기했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호통도 치고, 달래기도 했다. “얘야, 예수교는 서양귀신을 섬기는 것이란다. 우리 가문은 조상 적부터 공자님을 섬기는 유교 가문이다. 너는 우리 가문의 장손으로 제사를 받들어야 할 몸이다. 알았느냐?”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 한번 시작한 걸음이니, 예수교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나서, 그 때 그만두겠습니다. 그 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리고 주일마다 숙부를 따라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일 년에 몇 번씩 돌아오는 제사를 장손으로 받들었다.

그는 교회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교의 진리는 유교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교회에 가서 앉으면,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타향살이하던 나그네가 자기 고향집에 온 것처럼 그런 마음이었다. 이것이 그는 참 좋았다.

그는 교회에서 일본 나고야에 갔다 온 사람을 만나 일본 얘기를 들었다. 일본이 많이 발달해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나고야의 쥬교법률학교에 가서 배우면, 판사가 되어 범인들을 재판하는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귀가 솔깃했다. 그때부터 그는 일본말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설득해서, 23살 때 일본유학을 떠나 나고야 쥬교법률학교에 입학했다. 할아버지는 일본에 가면 예수를 안 믿을 것으로 알고 허락했다.

그는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많은 법률을 알아야 법관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1년이 채 못 되어 어머니의 부음(訃音) 편지를 받았다. 그는 학업을 중지하고 급히 귀국해서 상주(喪主)의 몸으로 장례를 치룬 후, 다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려고 하자, 할아버지는 탈상(脫喪)하기 3년 동안 외출을 해서는 안된다고 엄하게 막았다. 그는 유교의 허례(虛禮) 때문에 판사의 꿈을 접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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