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 나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중략) 우리가 죄를 지은 뒤,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죄지은 것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 보면 주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지난 8월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1부(김언학 부장판사) 재판정에서 피고를 향한 실형선고가 있기 전에 판사가 ‘드릴 말씀’이 있다며 참석자들의 양해를 구하고 쏟아낸 말이다.

▨… 이 법정 피고인이 목사라는 사실을 확인한 많은 목사들은 판사의 ‘드릴 말씀’ 앞에서 한결같이 고개를 떨구었다. 성경 요한일서1:8~10절을 먼저 낭독한 형식에서 설교(?) 같은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실형선고의 죄명이, 그 ‘드릴 말씀’의 내용이 신학적으로 적절한지 아닌지를 따질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기독교 2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말년은 인간적으로 비참했다. 눈은 멀었고, 위는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밤에는 불면증으로 시달렸다. 손과 발은 성흔의 아픔으로 이미 그 기능을 잃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어릿광대(pierrot)라고 말하였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감당하겠다고 하면서. (참고, 엄두섭·‘성프란체스코의 영성’)

▨…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판사의 ‘드릴 말씀’앞에 선 목사는 ‘삐에로’일까, 자기욕망의 화신일까. 삐에로라 해도 프란체스코의 삐에로는 아닐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자기’를 가리켜 ‘독재 정권’이라고 부른다. 자기라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최인철, 프레임) 자기를 제어하지 못해 형사합의31부에 서야했던 목사는 ‘자기를 부인하고’(마16:24)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 정다산은 “청렴한 관리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가 지나간 곳은 산림도 천석(泉石)도 다 맑은 빛을 받게 되기 때문”(목민심서)이라고 했다. 우리는 믿는다. 자기를 부인한 목사가 지나간 길의 산림도 천석도 성령의 밝은 빛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성결교단의 목사님들은 성령의 인도하심만은 확실하게 받는 분들이니 그 길의 산림도 천석도 밝은 빛을 받을 것이므로 판사의 설교만은 확실하게 사양할 수 있으리라. 누구도 아니라 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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