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나님

이성훈 목사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 리챠드 바크의 ‘영혼의 동반자’의 ‘무언의 약속’이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좋은 사이는 무언의 약속으로 살아갑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고, 말없이 상대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좋을 때, 잘 나갈 때도 무언의 약속은 힘을 줍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 때, 아프고 지쳤을 때, 더 빛이 나고 더욱 큰 힘을 발휘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일에서부터 숱한 일을 경험했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산’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출 19:2). 모세에게 있어서 그 산은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국어성경에서는 단지 ‘산’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만, 원문에서는 ‘그 산’(히. 하 하르, 출 19:2)이라고 하여 정관사 ‘그’가 첨가되었습니다. ‘그 산’(히. 하 하르, 출 19:2)이라고 했던 이유는 모세가 불꽃떨기 나무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던 시내산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 3:12)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던 모세에게 있어서 그 삶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단순히 광야의 삶이 고생스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궁중에서 최고의 것들을 경험한 모세에게는 그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내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충분히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고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명이기에 걸어야만 했던 모세만이 겪어내야만 하는 그런 아픔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는 모세의 내적 갈등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토록 마음고생을 하였던 모세였기에 시내산에 올라가는 감격과 감동은 아마도 남달랐을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산에 오르며 그토록 감격했던 이유입니다. 시내산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지탄의 대상으로 삼을 때 찾아오셨고, 소명을 주셨습니다.

바로의 서슬 푸른 위협 속에서도 이적과 기적을 경험케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감격과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모세는 시내산을 오를 때 우리 국어성경에서는 단지 ‘하나님’으로만 표현하였지만, 원문에서는 ‘그 하나님’ (히. 하 엘로힘 출 19:3)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히브리어의 독특한 문법적인 이유로 넘어갈 수 도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싶어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열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시내산에서 처음 만났던 ‘그 하나님’은 궁중생활을 경험했던 모세가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었던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이는 그가 ‘세상 바라보지 않음’ 그래서 ‘그 하나님 바라봄’이 가능했던 이유입니다. ‘세상 바라보지 않음’이 자칫 추상적인 말씀이 될 수 있을 듯하여 ‘세상 바라보지 않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누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림’과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누림’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적당히 타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결국 ‘누림’과의 싸움의 최절정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죽습니다. 반드시 망합니다. 세상과 싸우며 시내산의 ‘그 하나님’(히. 하 엘리힘)을 만나게 될 날을 더욱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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