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나님

“좋은 사이는 무언의 약속으로 살아갑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고, 말없이 상대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좋을 때, 잘 나갈 때도 무언의 약속은 힘을 줍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 때, 아프고 지쳤을 때, 더 빛이 나고 더욱 큰 힘을 발휘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일에서부터 숱한 일을 경험했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산’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출 19:2). 모세에게 있어서 그 산은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국어성경에서는 단지 ‘산’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만, 원문에서는 ‘그 산’(히. 하 하르, 출 19:2)이라고 하여 정관사 ‘그’가 첨가되었습니다. ‘그 산’(히. 하 하르, 출 19:2)이라고 했던 이유는 모세가 불꽃떨기 나무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던 시내산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 3:12)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던 모세에게 있어서 그 삶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단순히 광야의 삶이 고생스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궁중에서 최고의 것들을 경험한 모세에게는 그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내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충분히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고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명이기에 걸어야만 했던 모세만이 겪어내야만 하는 그런 아픔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는 모세의 내적 갈등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토록 마음고생을 하였던 모세였기에 시내산에 올라가는 감격과 감동은 아마도 남달랐을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산에 오르며 그토록 감격했던 이유입니다. 시내산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지탄의 대상으로 삼을 때 찾아오셨고, 소명을 주셨습니다.
바로의 서슬 푸른 위협 속에서도 이적과 기적을 경험케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감격과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모세는 시내산을 오를 때 우리 국어성경에서는 단지 ‘하나님’으로만 표현하였지만, 원문에서는 ‘그 하나님’ (히. 하 엘로힘 출 19:3)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히브리어의 독특한 문법적인 이유로 넘어갈 수 도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싶어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열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시내산에서 처음 만났던 ‘그 하나님’은 궁중생활을 경험했던 모세가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었던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이는 그가 ‘세상 바라보지 않음’ 그래서 ‘그 하나님 바라봄’이 가능했던 이유입니다. ‘세상 바라보지 않음’이 자칫 추상적인 말씀이 될 수 있을 듯하여 ‘세상 바라보지 않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누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림’과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누림’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적당히 타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결국 ‘누림’과의 싸움의 최절정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죽습니다. 반드시 망합니다. 세상과 싸우며 시내산의 ‘그 하나님’(히. 하 엘리힘)을 만나게 될 날을 더욱 소망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