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자비왕 때 낭산 아랫마을에 백결(百結) 선생이 살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 가계나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옷이 백 군데나 헤졌는데 그 헤진 데를 꿰매어 입은 모양이 마치 메추라기가 주렁주렁 달린 것과 같았다고 한다. 금(거문고)의 명인이면서도 가난을 감내하는 그를 그 시대의 사람들은 동리(東里) 백결 선생이라고 불렀다.

▨… 명절이 다가오는 어느 날 남의 집 떡방아 찧는 소리를 듣고 백결 선생의 아내가 찧을 곡식 없음을 한탄하였다. “무릇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있는 것이오. 오면 막을 수 없고 가도 좇을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상심하는가.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방앗소리를 내어 위로해 주리다.” 이에 거문고를 타고 방앗소리를 내니 세상에서 전하여 대악(樂)이라 이름하였다.(참고, 삼국사기)

▨… 목사들에게 추석 명절이란 무엇일까? 이웃집들은 모두 음식 장만으로 분주하고 추석 빔을 자랑하는 아이들은 ‘개천에 든 소’처럼 입놀림을 쉬지 않는데, 작은 교회 목사 집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하다. 쟁기 를 잡고 뒤돌아보면 주께 합당한 자될 수 없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탕자처럼 고향의 부모도 잊고 살아왔음을 목사라면 뉘라서 부정할 수 있을까.

▨… 그 티내면 안되는 가난까지도 백결 선생처럼 거문고 한 가락으로 씻어 내릴 수 있다면 그는 이 시대의 성결교회 목사가 아니라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아니겠는가. 백결선생을 흉내낼 수도 없고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제대로 닮지도 못한 목사들이 명절을 맞아 홀로 삼키는 아픔을 누구인가는 알아주기나 할까. 더구나 목회자간의 경쟁에서 낙오한 목사에게 찾아오는 명절은 어쩌면 시지프스가 감당해야 하는 형벌의 바위가 아닐까. 주께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 금년 추석 명절은 하필이면 주일 다음날이다. 안그래도 명절이 달갑지 않은 작은 교회의 목사는 주일 오후예배를 고집해야 할지 말지를 놓고 고민에 젖는다. 아무리 목사들에게까지 경쟁을 강요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목사다움이 이런 것을 결정하는데 따라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서글퍼하지 않을 목사가 있을까. 그래도 작은 교회의 목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미래와 가족들의 내일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다. “희망의 본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있다”(에른스트 블로흐)고 자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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