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역(南驛) 기도처 설립과 새성전 건축

당시 남역리(南驛里)에는 김해제일교회 신자들 22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주일 낮에는 김해성결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지만 주일 밤과 수요예배, 새벽기도회는 교회에 나오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남역리에서 김해교회까지는 2.5km 정도였지만 남역 고개가 있어서 밤에는 왕래가 힘들었다. 길이 협소할 뿐더러 양쪽에는 숲이 우거져 있고 해가 지면 산짐승들이 가끔 나타나 길손을 놀라게 했으며 길손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불한당들이 가끔 출현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밤 예배를 드릴 처소가 필요하여 기도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기도소의 설립자는 정주봉, 심상택, 한두조였다. 기도소의 터는 정주봉 집사가 헌납했고 건물은 김해교회가 인수했다. 기도소는 백삼선(백기훈 장로 부친)씨가 설계하여 99㎡(30평)의 목조 함석지붕 건물로 세워졌으며 이 기도소는 오늘의 활천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당시 세례교인은 정주봉, 강복덕, 김경수, 배두홍, 김정남, 한보배, 배복연, 이치옥, 임한승, 전유승, 김용성, 계용근, 허봉, 전정순, 손해룡, 김현명이었고 학습교인은 백정임, 류용식, 조동석이었으며, 구도자는 차손도, 손해주, 성정애였다. 남역기도소는 현재 활천교회의 전신이다.

김해교회 성전건축은 천 목사가 동양선교회에서 지급하는 자신의 자급 2년분을 가불받아 건축비를 충당하는 등 많은 희생적인 헌신을 통해 건축되었다. 1932년 성전건축을 위해 신도들의 헌금으로 김해읍 동상동 745-1에 소재한 대지 747㎡(226평)을 백일성 씨로부터 평당 17전 합계 38원 42전으로 구입하고 건축을 시작했다. 모든 신도들의 정성어린 기도와 헌금으로 건축이 진행되었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천세봉 목사는 그 당시 동양선교회에서 자급으로 보내주는 매월 25원 2년분 600원을 가불해서 헌금하여 건축비 총액의 반 이상을 혼자 담당했다. 천 목사의 희생적인 봉사는 교회건축에 큰 원동력이 되었고 이에 감동을 받은 송정순 씨는 집 한 채를 헌납하고 또한 많은 신도들도 감동을 받아 힘껏 헌금을 하여 그해 12월에 교회는 준공되었다. 12월말 교세는 장년 100명, 유년 100명이었다.

대지 747㎡(226평), 건평 155㎡(47평)의 목조 아연함석으로 지어진 김해교회는 1933년 1월 10일 감격의 성전봉헌예배를 드렸다. 이날의 봉헌예배는 경남지방 순회목사인 전성운 목사가 집례를 하고 담임 천세봉 목사가 기도했고 성결교회 창립자이며 봉헌기념부흥회 강사인 김상준 목사가 설교했다. 그리고 그해 2월 2일에 예배당을 재단법인 예수교동양선교회 유지재단에 보존 등기했다.

1932년 4월에는 김해군 가락면 성덕리에 기도소를 설치하고 성도들이 교대로 전도했다. 그리고 그해 6월 9일에는 만장대 뒷산의 서재골 계곡에서 침례예식이 거행되었다. 초기성결교회는 세례를 침례예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천세봉 목사는 약 2년 동안 김해교회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전도와 이웃사랑에도 앞장섰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도왔고 추위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옷을 벗어주었다. 그는 2년 동안의 생활비를 가불해서 성전 건축헌금을 바쳤기 때문에 개인생활에는 경제적인 타격이 많았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지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 사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니 치유가 되었고 미친 자를 위해 기도하면 귀신이 달아났지만 한 번도 이를 자랑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좋은 목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선한 목자로, 참 목자로 존경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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