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8월 20~26일 금강산에서 만났다. 이산가족 상봉은 2015년 이후 3년 만이다.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됐다는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럽다. 남북한 이산가족들은 상봉의 현장에서 그 숱한 날들을 그리움으로 꼬박 새웠을 가족들을 서로 안고 감격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고령이 된 이산가족들은 꿈에 그리던 부모 대신에 형제자매들과 만났으며, 이미 모두가 고인이 된 가족의 경우는 형제들의 직계 가족들을 만나는 것으로 이산의 한을 달랬다. 우리 교단의 최동규 원로목사도 북에 두고 온 여동생의 직계 자녀들을 만났다. 65년 만에 혈육을 만나는 시간 동안 기쁨과 회한이 격하게 교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의 이면에는 감격과 환희 못지않은 아쉬움과 절실함도 보인다. 이번 상봉에서는 569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겨우 만남이 성사되었지만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다. 지난 4월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에 따라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뤄졌지만, 한반도 정세가 악화하거나 남북 관계가 순탄하지 못하면 언제 중단될지 알 수 없다.

남북관계가 순풍을 탄다고 해도 고령의 이산가족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이제 이산가족 1세대들은 하나둘씩 가슴에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에서도 7월에만 해도 316명이 평생소원이었던 북측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통일부에 따르면 올해 7월 말 기준으로 생존해 있는 이산가족은 5만6000여 명이다. 생존자의 85% 이상이 70대가 넘는 고령자다. 1회에 90~100명이 이산가족 상봉을 한다면 상봉 행사가 600회 가까이 열려야 모든 이산가족이 북의 가족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혈육을 만나는 일에 정치적, 이념적 문제가 개입돼서는 안 된다. 이산가족은 남과 북이 똑같이 겪고 있는 아픔이다. 부모 형제 친척들을 지척에 두고도 못 만나는 그 고통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그 맺힌 한을 다 풀 수야 없겠지만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바로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다. 그 아픔과 그리움의 크기를 생각해볼 때 이번 기회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산가족이 평생소원인 가족들을 만날 기회를 더 확대해야 한다. 한 핏줄을 나눈 형제를 또다시 갈라놓는 일은 더 없어야겠다. 어떤 이념이나 체제도 혈육을 갈라놓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오는 9월 중에 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남북문제는 하루아침에 만족할 만한 성과가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인도주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고령의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남측과 북측이 무슨 결단이라도 내려야 한다.

당장 생존 신청자들의 가족 상봉 또는 전면적인 생사확인 등을 위한 남북한 당국의 적극적인 협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상봉의 정례화와 규모 확대는 물론 편지 왕래, 첨단기기를 사용한 화상 상봉 등도 고려할 만하다. 이산가족의 최대 염원인 고향 방문도 본격적인 협의를 해야 한다.

창세기에는 요셉이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혈육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이며 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될 수 없는 죄악이다. 분단된 땅에서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이산가족 상봉과 그 상설화를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

앞으로 다시 만날 남북의 정상이 이산가족 상봉 문제에서 전 세계가 놀랄 획기적인 합의도출을 기대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함께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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